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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백년 한 푼 발트3국/독립계기로 알아본 수난의 역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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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20년 빼곤 줄곧 외국이 지배/독­소 사이에 끼여 양국이해 희생물
6일 소련 국가회의가 발트해 3국의 독립을 승인함으로써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인들은 지난 8세기 동안 계속돼온 한맺힌 역사적 숙원을 풀었다.
3국 모두 합쳐 한반도 전체크기의 5분의 4에 불과한 소국인 이들 나라는 역사를 통해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숱한 외침을 받아왔다.
18세기 이후 러시아 영토로 흡수됐으며,제1차 세계대전 이후엔 잠시 독립을 누리다 다시 소련의 속국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독립의지는 수그러들줄 몰랐으며 드디어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발트해 3국 독립은 20세기 그들에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국의 민족·역사적 특색=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는 13세기 게르만족 한 영주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국가형태를 이루지 못했지만 리투아니아는 18세기초 러시아 표트르대제에 정복당하기까지 어엿한 왕국이었다.
러시아에 정복된 후부터는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사이 1918년부터 1939년의 짧은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러시아·소련의 지배를 받아왔다.
종교적으로는 리투아니아 주민들은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이지만 에스토니아·라트비아는 개신교 신자들이 많다.
민족성도 에스토니아인은 말이 적은 과묵형이지만 리투아니아인은 사람들 앞에서 열변을 토하는 웅변형이다.
또 라트비아인들은 도시에 많은 인구가 집중돼 살지만 리투아니아인들은 농촌에 많이 거주한다. 언어는 러시아어와 완전히 다르다. 또 이들 3국언어끼리도 얼핏보면 유사하지만 별개 언어다.
역사적으로 에스토니아는 핀란드만을 사이에 두고 북쪽에 위치한 핀란드와 밀접하고,과거 폴란드왕국의 영토였던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폴란드와 가깝다. 라트비아는 게르만 영주지배를 받은 영향때문에 독일계 주민이 많다.
◇리투아니아=13세기초 민다우가스왕이 첫 통치자의 지위에 오르면서 어엿한 왕국이 됐으며 1569년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의 귀족들이 함께 선출하는 왕이 통치하는 방식으로 폴란드와 통합됐다.
그뒤 18세기말 폴란드가 오스트리아·프러시아·러시아 3국분할로 멸망함에 따라 러시아에 통합됐다.
1918년 러시아혁명 직후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선언했으나 1939년 독­소간에 체결된 발트해 3국의 소련 편입을 규정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비밀조약에 따라 1940년 소련에 다시 병합됐다. 이듬해인 1941년 독소 개전후 독일군대가 이 지역을 점령,3년간 주둔했으며 제2차대전 종전과 함께 다시 소련의 일부가 됐다.
현재 인구는 3백70만명으로 80%가 리투아니아인이며 러시아인과 폴란드인이 각각 9%,7%를 차지한다.
◇에스토니아=3국중 가장 북쪽에 위치한 에스토니아는 유목민족의 국가다.
10∼12세기 러시아인의 계속되는 침략에 시달렸고,13세기초 게르만과 덴마크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으며 16세기초까지 그 지배하에 있었다.
1625년 스웨덴에 병합됐으며,18세기초 스웨덴을 몰아낸 러시아에 다시 흡수됐다.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은 20세기초 전세계적으로 민족주의가 고양됐을때 농민계급들이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면서 시작됐다. 인구 1백60만명으로 에스토니아인(62%),러시아인(30%) 등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도 핀란드와의 교통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앞으로 양국간 경제관계는 더욱 밀접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라트비아=17세기초까지 게르만족이 통치했으며 그뒤 1백여년간 스웨덴왕의 통치를 받다 18세기초 표트르대제에 의해 러시아에 정복됐다.
수도 리가는 독일과 북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갈도로와 로마네스크·고딕·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즐비하며 인구는 1백만명으로 3국 도시들중 가장 많아 이 지역 중심도시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
역사적으로 15,16세기 리가는 한자동맹(북유럽 상업도시들간의 경제·방위공동체)의 교역중심지였으며 북유럽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인구는 2백70만명으로 라트비아인이 52%,러시아인이 34% 등이다.<강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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