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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의펜화기행] 설움의 흔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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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1895년 이전의 영은문, 종이에 먹펜, 36×50, 2007

독립문 소공원의 독립문 앞에 키가 큰 돌기둥 두개가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의 주춧돌이랍니다. 영은문이 얼마나 높았기에 주춧돌의 높이가 5m나 될까요.

조선 태종 7년(1407) 서대문 밖에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그 앞에 홍살문(紅箭門)을 세웁니다. 세종 12년(1430) 규모를 확장하고 이름을 모화관(慕華館)으로 바꿉니다. 중종 32년(1537)에는 홍살문이 초라하다 해서 헐어내고 높은 주춧돌 위에 청기와를 올린 쌍주문(雙柱門)을 세웁니다. 절의 일주문(一柱門)과 비슷해 보이나 높이가 11.5m로 훨씬 크고 화려합니다. 높기 때문에 쓰러질 염려가 있어 쇠줄 네 개를 이용해 앞뒤로 고정시켰습니다. 기둥과 창방 아래에 운각판(雲刻板)을 붙여 튼튼하면서 동시에 화려해 보이도록 했습니다. 영조문(迎詔門)이란 현판을 걸었으나 중종 34년(1539) 명나라 사신 설정총의 지적으로 영은문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독립문과 그 앞에 서 있는 영은문의 주춧돌.

영은문에는 약소국인 조선의 설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당시 중국의 횡포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조선의 처녀들까지 조공으로 바치게 강요합니다. 평민뿐만 아니라 벼슬아치의 딸도 선발을 합니다. 태종 8년(1408) 중국으로 보낼 처녀를 뽑는 자리에 평성군 조견의 딸이 중풍에 걸린 것처럼 입을 실룩거리고, 이조참의 김천석의 딸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으며, 전 군자감 이운로의 딸은 절름발이처럼 절룩거려 선발을 모면해 보려고 합니다. 화가 난 중국 사신 황엄은 아버지들을 귀양 보내고 파직하도록 합니다.

이렇게 선발된 처녀들이 영은문에서 가족과 생이별을 할 때 부모형제들의 울부짖는 소리로 영은문 주위는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으니 사신의 배웅을 나온 조선 국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청일전쟁이 끝난 뒤인 고종 32년(1896) 영은문은 사라지고 대신 독립문이 들어섰습니다. 이때 영은문의 주춧돌을 남긴 것은 치욕을 기억하고 자주를 위해 국력을 키우자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김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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