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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찰간부의 참담한 사연(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연속되는 대기근무 때문에 아내가 숨진 사실을 이틀뒤에야 알게 된 한 경찰간부의 사연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가슴이 더욱 무거워지는 것은 이 사연이 결코 어느 한개인의 기구한 사연이지만은 않다는데 있다.
동료의 슬픈 사연을 접하고 달려온 동료간부들이 『우리들은 집에 못들어간지가 얼마나 되는지 기억조차 안 난다』고 위로인지 푸념인지 모를 소리를 했다지만 이런 사정은 비단 경찰간부들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사정은 위아래가 똑 같다. 육체적인 괴로움만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일선 경찰관들 쪽이 훨씬 더할 것이다. 외근경찰관들의 경우는 비상근무때가 아니더라도 집에 들어가는 날보다 안 들어가는 날이 더 많은게 현실이다. 게다가 걸핏하면 비상이요 특별단속 아닌가. 일선 경찰관들 사이에 비상근무령은 6·25때 내려진 이후 해제된 적이 없다는 자조섞인 농담이 나돌고 있는 것도 전혀 무리가 아니다.
경찰의 이러한 견디기 어려운 격무는 인력부족에도 원인이 있다. 그러나 인력부족은 그 한가지 작은 원인일 뿐이다. 원인의 큰 가지는 사회의 온갖 병폐와 갈등을 최종적으로는 온통 경찰에 맡겨 그것을 물리력으로 해결하려들고 그 실적으로 국민의 인기를 얻으려는 권력상층부의 안이한 자세에 있다.
현 우리 사회의 병폐와 갈등이 어디 경찰 스스로가 만들어낸 것인가. 경찰에 짐지워진 각종 범죄와 시국사건·무질서 등은 근원적으로 향락과 사치풍조,엄청난 빈부격차,분출구가 없는 이념갈등,만연한 부정과 부패등 우리사회 모순의 산물이다. 그것을 경찰의 힘만으로 어쩌겠는가. 아무리 경찰을 증원해도 사회가 더 많이 그런 문제들을 빚어낸다면 그것은 영원히 토끼와 거북의 경주가 될 뿐이다.
그런데 고위층에선 책상머리에 앉아 국민에게 보여줄 가시적 성과를 위해 그저 일선 경찰을 닦달하고 있다. 인천중부서장의 기막힌 사연도 「범죄와의 전쟁 50일작전」때문에 빚어졌다.
「범죄와의 전쟁」1주년이 다가옴에 따라 국민에게 제시할 실적을 쌓기에 급급하다 보니 그런 사연도 생겨난 것이다. 범죄가 어디 50일의 작전으로 없앨 수 있는 문제인가. 수배자들을 못잡는게 어디 게으르고 생각이 없어서인가.
한 경찰간부가 대기근무 때문에 숨진지도 몰랐던 아내의 영정앞에서 울먹이고 있는 날 경찰청은 수배자의 검거실적이 없다고 41명의 경찰간부들에게 무더기 경고를 했다. 이것이 아래로,또 아래로 어떤 파급효과를 나타낼 것인가 하는건 너무도 뻔한 일이다. 경찰관들은 경찰관들대로 고달퍼지고 국민들은 국민들대로 무리한 수사때문에 시달릴 것이다. 또 수사력이 그에 매달리면 다른 범죄는 어쩔 것인가.
손놓고 있으라는게 아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으라는 말이다. 일을 합리적으로,효율적으로 추진하라는 말이다.
하기는 그래서 범죄자들을 잡은들 뭣하나. 기껏 잡은 범죄자가 교도소안에서 왕노릇하고 금방 풀려나고 있지 않은가.
경찰관이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사일 수는 없다. 닦달하기전에 격무와 박봉문제를 해결해 줄 궁리부터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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