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98)경성야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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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내가 18세로 고등보통학교 5학년 때인 1926년은 여러가지 면에서 다사다난한 해였다.
우선 신년초에 조선을 통치하는 최고기관인 총독부가 남산의 왜성대에서 광화문으로 옮겨졌다.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디딤돌 삼아 장차 만주와 중국대륙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다.
일본 외상 고무라(소촌수대낭)가 포츠머스 강화조약에서 만주의 이권을 러시아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은 것은 이런 속셈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일본이 제일 먼저 조선을 제손아귀에 넣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때 일본은 조선을 지구상에서 아주 없애 버릴 작정으로 일본 사람과의 결혼을 장려하는 묘안을 짜내기도 하였다.
조선을 없애버릴 최초의 작업으로 조선의 왕궁을 헐어버리고 거기에다 정복자인 일본의 총독부를 세우는 일이었다.
그래서 광화문을 헐어낸 다음 경복궁 근정전을 눌러버릴 5층짜리 거대한 백악관을 짓고 이곳으로 총독부를 옮겨 놓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 건물을 바라볼 때 2천만 조선사람들의 감정이 어떠하리라는 것은 전혀 안중에도 없이 정복자로서의 쾌감을 만끽하면서 조선왕궁과 조선민중을 짓밟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이사온지 며칠안되는 2월에 조선 땅덩어리를 일본한테 바치고 많은 돈과 높은 작위를 받은 매국의 수괴 이완용이 병으로 죽었다.
역적 이완용의 죽음에 대해 민중들은 할말이 많았지만 총독부의 감시로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중 조선일보에서『노유생의 투고』라는 만가십절을 실었다.
처음에는 총독부 검열관이 무식해 무슨 뜻인지 모르고 그냥 통과시켰다가 나중에 글 뜻을 알고 삭제명령을 내렸다.
우봉낙조송군귀(우봉은 이완용의 본관)완복종비도하용(완복의 완,도하용의 용은 합해서 완용)
옥동도화춘편시(옥동은 이의 주거동명)신태방초우황혼
생전부귀총리대신(총리대신은 총리대신) 사후문장 일당거사 (일당은 이의 호 일당)
진아근농동창귤 상녀유창후정화황금벽상처처제명(공동변소에 이완용 요리집이란 낙서)자하방외인인적국(자하방은 옥동)
인간칠십고내희 단막세학장부단
문하삼간고기산 저변하견폐계명
와석종신부사의 와신상담무가나
만인규주후뇌자 오후칠귀동배주
만인훤전사목즉 장사 일거부복환
황금부화황천린 적치선구적노아
인간무정토 분외유청산
『옥동리후작만가십절』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는 칼을 맞지않고 병사한 이완용의 일생과 소행을 품자와 해학으로 여지없이 욕보인 통쾌한 글이었다.
옥동은 이가 살았던 동네이름이고 후작은 그가 일본정부로부터 받은 작위다. 이것으로 조선사람의 그에 대한 감정을 알수 있을 것이다.
그당시 서울시내 공동변소에는 반드시 「이완용의 요리집」이라고 쓴 낙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만가십절 가운데 제5절에 있는 『황금벽상 처처제명』이 바로 그것이다.
제3절에서는 또 이완용의 호(일당)를 빗대어 「일당거사」로 부르는가 하면 총리대신을 「총리대신」으로 비꼬기도 했다.
일본정부에서는 이완용의 장례식때 천황이 칙사를 보내고 무덤은 송장을 파내거나 건드리지못하도록 몇 겹으로 튼튼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생전에 몇번이나 칼을 맞고, 전국민의 원성과 저주를 받았으면서도 매국노 이완용은 70세까지 살았던 것이다.
이 만강은 그때 내가 조선일보에서 오려내 지금까지 스크랩북에 담아두고 있다. 그해 4월26일에는 또 대한제국 최후의 황제인 융희황제가 승하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합병시킨 뒤 고종황제를 이대왕이라고 부르고, 융희황제를 이옥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왕전하는 원래 몸이 약해 오래 살 수 없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므로 고종황제가 승하할때와 같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은 없었다.
그때 우리집이 동관대궐(창덕궁을 보통 그렇게 불렀었다) 바로 아래인 운니동에 있었으므로 모든 동정을 자세하게 알수 있었다. 신문호외로 승하소식을 알고는 어떻게 되나 하고 궁금해 돈화문 앞으로 가보았더니 큰 문 셋이 다 굳게 닫혀 있었고 아무동정도 없었다.
이상해서 저녁때 다시 가보았더니 지팡이를 짚은 갓쓴 노인 셋이 대문 기둥앞으로 가 엉엉하고 소리내어 울고있었다.
이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그곳으로 몰려가 모두들 대성통곡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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