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문화계시련(15)사회운동에 열 올렸던 황석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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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나의 바람은 저자거리에서 하나의 이름없는 광대의 몸짓으로 이름없는 수많은 광대들의 삶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작가 황석영씨(48) 가 84년10년에 걸친 신문연재소설 『장길산』을 탈고하며 한 말이다.
30대를 송두리째 바치며 황씨가 형상화시킨 조선후기 광대틈에서 자란 의적 장길산같이 황씨 자신도 문단에서는 「황길산」으로 불리는 「광대」이자「의적」이다.
『바짓가랑이 속 물건은 일년열두달 축 늘어져있기만 해도넥타이 맸다고 다 신사냐. 이비암으로 말할 것같으면…』으로 시작되는 뱀장수·약장수며, 곱사등이 병신춤이며, 구성진 육자배기 판소리등 온갖 「광대짓」으로 술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을 흥겹게 해 웃다보면 도대체 술취할 틈을 주지 않았다. 황씨는 또 광주민주화운동의 본격르포인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를 85년도 펴냈으며 88년말 민중문화예술운동의 결집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주도적으로 결성한 이후 89년3월 「분단의 비극을 가시고 문예부문에서 남북교류를 트기 위해」 밀입북, 현재 입국을 미룬채 독일에 머무르고 있다. 입버릇처럼 「분단시대의 작가」임을 되뇌던 황씨는 이체 분단된 남북 그 어디에도 발붙이지 못한 국제미아가 된것이다.
2년여 입국하지 못하고 국제저자거리를 헤매고 있는 황씨에 대해 계간문예지 『문예중앙』가 을호는 한 후배문인의 편지형식을 통해 문단에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으며 월간 『사회평론』 9월호는 지상대담으로 황씨의 문학관·통일관을 점검하고 있을 정도로 황씨는 여전히 국내의 민중운동·문학진영에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황씨가 문단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은 62년 『사상계』 신인상에 『입우부근』이 당선되면서다. 고교 2학년으로서 화려하게 문단에 나온 황씨는 그러나 그의 표현을 빌리면 「부잣집 머리좋은 아이들이 모인 명문경복고」를 중퇴하고 10년간 부랑생활에 나서 사회하층생활을 체험한다. 공장의 견습공으로, 공사판의 막노동꾼으로, 월남전의 해병대로 밑바닥을 체험한 황씨는 70년 일간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재등단, 그 체험을 바탕으로한 소설들을 잇따라 발표하며 70년대의 주요작가로 부상한다.
특히 뿌리뽑힌채 떠도는 막노동꾼을 다룬 『객지』나 월남전을 소재로한 『무기의 그늘』은 민중문학이나 분단문학의 새 장을 열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그러나 황씨를 대형작가로 키운 것은 대하 『장길산』. 구월산의 의적 장길산의 일대기를 축으로 당대 민중의 삶을 복원한 이 작품을 74년부터 연재하면서 황씨는 실제「민중속으로」를 부르짖으며 77년 전남해남으로 내려갔다.
그때부터 소설이 탈고되는 84년까지 황씨는 해남·광주·제주등지를 전전하며 사랑방농민학교·놀이판광대·탕라민속연구회등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민중과 어울리며 민중의 체취를 느껴 『장길산』으로 옮김과 동시에 지역민중문화운동의 뿌리도 내리게 했다.
이렇게 민중과 함께하며 얻어낸 『장길산』은 『남북을 통틀어 한 조선인(한국인)의 진면목을 보여줘 문학사 뿐아니라 분단사회사속에서 차지하는 가치도 크다』는 평론가들의 일치된 평가와 함께 그를 대형작가로 올려놓음과 함께 그를 현장의 민중문화운동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광주민주화운동 기록인 『죽음을 넘어…』를 퍼내 85년5월31일 유언비어유포혐의로 즉심에서 구류10일에 처해지면서 황씨는 소설가로서 보다 반체제 민중문화운동가로서 세인의 주목을 받게된다. 구류를 산직후인 85년6월 서독 베를린시 초청으로 「85아시아문화제」에 참석키위해 베를린에 간 황씨는 그후 1년간 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스페인·포르투갈·미국·일본등지를 전전하다 86년5월9일 귀국한다.
그러나 김포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황씨는 당국에 연행돼 해외에서의 반체제발언등을 문제삼아 12일간 조사를 받았다. 그해 8월 미국에서 사귄 무용가 김명수씨(38)와 재혼한 황씨는 서울근교에서 새삶을 차리고 『백두산』등의 신문연재등
작품활동에 몰두하는듯 했으나 88년 서울국제펜대회를 맞으면서 참여문학진영의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민족문학연구소장으로서 황씨는 『투옥문인이 있는한 펜대회에 참여할수없다』며 펜클럽대회기간동안 따로 「88%서울 민족문학제」를 주도해 나갔다. 이후 황씨는 그해말 주비위원으로서 각,예술장르를 망라한 민중문화예술운동의 결집체인 민수온을 주도적으로 결성, 기존의 예술단체인 예총과 맞서게 했다.
그러나 80년 2월28일 『무기의 그늘』 일어판출판기념회에 참석차 도일했던 황씨의 입북사실이 한달뒤에 매스컴에 발표되자 그해 남북작가회담을 제의해 놓고있던 참여문학진영은 물론 전 문단이 발칵 뒤집혔다. 『한창 남북교류가 제의되고 현실화되고 있는 마당에 섣부른 개인적 행동은 오히러 역효과를 가져오지나 않겠느냐』『자신이 무슨 「장길산」이나 되는것 처럼 그렇게 분단의 벽을 훌쩍 뛰어넘는 것은 소영웅주이다』라는 비난에서부터 『누군가가 먼저 넘어야할 벽을 넘은 분단시대 작가로서의 용감한 행동』 등의 찬사에 이르기까지 황씨의 밀입북에 대하여는 그 해석이 구구하다.
그러나 북한을 두번이나 방문, 김일성도 만나고 그곳 주민들로부터 「통일영웅」대접을 받은 황씨는 최근의 지상대담을 통해 『지구상에서 가장 냉혹한 적대관계이며 반공선전으로 일관되어목 남에서 북으로 직접가 보고 들은 사실들을 대중에게 알리고 싶었던 작가로서의 시대적 사명감』때문에 입북했다고 밝히고있다.
그렇다면 『황씨가 떳떳하게 국내에 들어와 그것을 알려야되지 않느냐』는게 문단의 일반적 지적이다.
비록 보안법에 묶여 투옥된다 하더라도 「망명작가」가 아니라 분단의 현장, 모국어의 현장에 남아있는 것이 분단시대작가외 도리라는 것이 황씨을 아끼는 주위문인들의 지적이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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