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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매 맞는 공권력 방치할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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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화염병과 최루탄. '극렬시위'와 '강경진압'의 상징물이다. 두 앙숙의 역사는 우리 현대사회사(史)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 맹렬하게 맞붙었고, 조용하면 뜸했다.

화염병이 군중 시위에 본격 등장한 건 1983년이다. 대학생들의 반독재 데모에서다. 학생운동 조직인 삼민투(三民鬪)가 결성된 85년부터는 확 늘어났다. "6공 때까지 연평균 1천번 가까운 화염병 시위가 벌어져 20만개 이상이 던져졌다"고 경찰은 기록하고 있다. 하루에도 몇번 꼴이다.

화염병의 전성기는 한총련이 가장 극렬했던 96~97년이었다. '강화 화염병'이라는 게 그때 나왔다. 휘발유에 설탕과 에나멜을 섞어 끈끈하게 점도를 높였다. 그래서 진압복에 붙으면 물을 부어도 잘 꺼지지 않았다. '전구 화염병'도 개발됐다. 전구의 꼭지를 떼어내고 휘발유나 시너를 넣었다. 던지기도 좋고 멀리 날아갔다.

최루탄이 한국에 처음 선뵌 건 52년이다. 유엔군이 거제도 폭동 진압에 썼다. 우리 경찰의 첫 발사는 60년 '3.15 부정선거'규탄 시위 때다. 화염병이 난무한 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사용량이 엄청 늘었다. 거리 구석구석이 가스 냄새에 절어 있던 시절도 있었다. 근접분사기, 총처럼 쏘는 발사용, 지랄탄으로 불린 다연발탄, 사과탄으로 불리던 투척용…. 이렇게 종류도 다양했다.

드세던 화염병의 기세는 한총련이 몰락을 자초한 96년 연세대 방화사건과 97년 한양대 폭력시위를 고비로 급격히 꺾였다. 그러면서 거리에서 사실상 사라졌다.

이듬해인 98년 경찰은 '무(無)최루탄 원칙'을 선언했다. 물론 화염병이 수그러든 게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과거 공권력과 싸우던 야당 투사가 대통령이 돼 세상이 바뀌었다는 점을 경찰 수뇌부가 고려한 측면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시위 현장에서 의경들이 두들겨 맞고 여경들이 얼굴에 계란 세례를 받아도 그 원칙을 고집하며 자랑으로 삼았다. 그러기를 5년. 장비는 녹이 슬었고, 경찰에는 지금 최루탄을 제대로 쏠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난 9일 민주노총의 도심집회는 경찰의 그런 고집과 자만이 위험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사라졌던 화염병 수백개가 무더기로 날았다. 최루탄이 잠자는 사이 화염병의 역사가 부활한 것이다. '너트 새총'이라는 살상용 신무기도 그날 등장했다.

최루탄이 두려워 20~30m 떨어져 던지면서 싸우던 과거의 시위 장면은 이미 경찰과 맞붙어 육박전을 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다. 어느덧 경찰은 아무렇게나 다뤄도 좋은 만만한 상대로 전락한 것이다. 쇠파이프와 몽둥이가 춤추는 싸움터에선 매번 부상자가 속출한다. 민주노총 시위 때 1백명이 넘게, 열흘 뒤의 농민시위 때는 50명 넘게 다쳤다. 그 다음날 부안에서는 앰뷸런스에 탄 부상 의경을 시위대가 집단 구타한 일도 벌어졌다.

엊그제 부안군민대책위 홈페이지에 "살덩어리가 찢긴 전.의경 얼굴 꿰매기에 지쳤다"고 띄운 경찰병원 의사의 하소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더 큰 희생이 나기 전에 최루탄을 다시 끄집어 내라는 주문도 나온다. 생각해 볼 문제다.

어느 나라 경찰이 백주대로에서 시위대에 쇠파이프로 매를 맞으며 생명을 위협받는가. 취객이 경찰관서에 들어가 행패 부리는 무법이 어느 나라에서 통하겠는가. 따져보면 경찰이 자초한 일이다.

지금 경찰은 5년 동안 뭉개진 공권력의 영을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낙관은 금물이다.

김석현 사회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