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제 쓰는 주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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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딤동, 딩동.
조용한 집안 분위기를 뒤흔드는 이른 아침 초인종소리.
아침의 쓰레기들을 미처 치우지 못한 어수선한 상태에서 찾아 든 사람은 분명 반가운 방문객일리 만무하다.
방마다 제 멋대로 팽개쳐진 물건들을 뭉뚱그려 한쪽으로 펼쳐 놓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이구 내가 너무 일찍 찾아 온건 가. 엄마들이 바쁜 일이 있는지 접에 없을 때가 많아 좀 일찍 왔지』넉살좋게 웃고 있는 사람은 아래층 사는 아주머니였다.
『아주 좋은 물건이 있는데 내려와 구경해요. 별 것 다 있다 우』내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계단을 타고 쏜살같이 내려가 버린다)
아래윗집 살면서 잠깐 내려와 구경 좀 하라는데 내 형편만 생각하고 그냥 앉아 있기에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아 난장판 같은 집 치우는 일은 나중으로 미루고 내려가 보았다.
방안 가득 쌓인 물건을 사이로 나처럼 호출 당한 몇몇 아는 얼굴들이 비쳤다.
신발·화장품·그릇·세제 등…
산뜻한 색상, 멋진 디자인의 갖가지 물건들이 다국적 상표를 매달고 있었다. 제품용도 설명과 값을 얘기하자 너도나도 하나씩 집어들고 요리조리 살핀다.
『역시 물 건너 온 게 좋더라 구.』
『코쟁이들이 만든 물건은 어딘지 달라.』
『홍콩제도 괜찮은 것 같애.』
『외제 물건 몇 개쯤 있어야 주방이 산뜻하고 그 집 주부의 생활감각이라든지 미적 감각을 엿볼 수 있더라 구 글쎄.』
자기 얼굴 만한 쟁반을 들고 있던 아주머니가 덧붙였다.
한때 서민들은 꿈속에서도 만져 볼 수 없는 고가의 외제 호화가구가 공공연히 거래되고 있다고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더니 며칠 전에는 온통 외제 물건으로 장식한 빌라에 관한 뉴스를 접하고 기가 죽었는데 내 주위에까지 값비싼 외제 생활용품이 헤집고 들어왔다는 사실에 씁쓰레한 감정을 배제할 수 없었다.
외제 스푼하나 없는 우리 집 살림살이가 애국심이냐, 자존심이냐고 마음속에 헤아려 본다.
같은 용도의 물건 한 개 값이면 국산 몇 개를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일제·미제를 뿌리쳐 왔다. 더구나 비싼 값으로 샀다가 고장났을 경우, 어쩔 것인가. 속 편하게 국산 쓰고 나라에 애국하자는 것이 나름대로의 생활철학이다.
그 나라 경제의 소비주체는 주로 주부들이다. 우리 주부들이 좀더 규모 있게 생활하고 우리나라 물건을 애용하는 자존심을 가질 때 갈수록 어려워지는 우리경제는 활로를 찾지 않을까. 소비의식의 선진이 앞서지 않고는 난마처럼 얽힌 우리경제는 활로를 찾기 힘들 것 같다.
김연희<양천구 목동 신시가지 아파트 143l동15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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