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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바쁜 사회과학 출판사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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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90년대 들어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이념서적의 판매 감소가 가속화되자 활로를 찾아나선 이분야 출판사들의 발길도 분주해졌다. 타개의 방향은 크게 나눠 셋방향.
▲시·소설등 문예물 폭으로 무게중심 이동▲주제및 표현의 대중화▲출판영역의 다변화다.
즉 ▲독자층이 두텁고 시강규모가 큰 문예물 발간에 주력, 기반을 튼튼히 닦은 다음▲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이념적 편향성에서 벗어나 객관적시각을 갖춘 책을 엄선해 출간하고 ▲아동도서·만화·대중적 과학서·기업경영 관련서·SF소설·추리소설등으로 출판영역을 다변화함으로써 종합출판사를 지향한다는 것.
이념도서 퇴조에 대한 출판계의 원인분석은 대체로 일치한다.
첫째, 독자들의 지적 호기심이 상당부분 충족될 정도로 웬만한 책들은 거의 소개됐고
둘재, 소련과 동구권의 개혁으로 북한및 사희주의에 대한 관심이 크게 줄어들었으며 셋째,국내외 정세의 변화에 따라 정치적 허무주의가 만연, 이념서적보다 실용적인 책, 어렵고 복잡한 책보다 쉽게 다이제스트화된 책을 찾는 독서경향의 변화를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그러나 이같은 이념서적 퇴조현상을 사회과학 출판계의 「위기」가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를 회복하는 과정으로 보는 출판인도 많다.
고도의 지적 수련을 전제로하는 사회과학도서는 안정된 사회체제 아래에서는 결코 시장성을 확보할수 없는 것이 세계출판시장의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것.
원래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세계적으로 독자층이 얇아 기업이나 정부의 지원금을 받아 출판하는게 보통이고 상업출판은 지극히 예외적 경우라는 주장이다.
그와같은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80년대 10년간 지속됐던 이념도서의 황금시대는 『압력을 가하면 가할수록 폭발하는 순간의 파괴력도 그만큼 커진다』는 상식조차 간과했던 역대정권의 「탄압의 선물」이라는 주장에 토를 다는 출판인은 거의없다.
보일듯 말듯 베일에 싸인 여체가 실오라기 한줄 걸치지 않은 알몸보다 더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느껴지는 경우와 흡사하다는 것.
규제와 탄압은 호기심과 신비감을 자극했고 그것은 가치관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 끊임없이 위험수위에 도전해온 출판사들로 하여금 다양한 지하유통구조를 통해 더많은 독자들을 손쉽게 유인할수 있도록 도와줬다는 해석이다.
80년대 인문·사회과학서적의 황금시대를 연 책은 박정희 전대통령의 피살과 함께 막내린 70년대, 그 70년대를 한달여 앞두고 출간된 『해방 전후사의 인식』(한길간) 이라는게 통설.
그후 82년초 「이념도서의 부분해금 조치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개론서들이 폭발적인 붐을 누렸고 잇따라 납·월북 작가들의 해방전 작품과 연변 동포작가들의 저작물및 북한 원전들로 사회과학 출판물계는 뜻밖의 호황을 누렸다.
「정치경제학 강좌」가 대학의 정식 커리큘럼으로 채택되자 마르크스와 레닌의 원전들도 유행을 탔다.
대학생들의 새로운 가치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는 젊은 연구자들을 자극,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민중적 시각의 「한국사」책을 양산케 해 「대체교과서」 출간이란 학술운동의 한 주요한 흐름을 정착시키기도 했다.
80년대 황금시기의 주역이 독자들과 출판사라면 연출은 탄압정책을 고수했던 역대 정권인셈이다.
최근 국내외정세의 변화에 따라 퇴조하는 이념서적에 미련을 두지않고 새로운 독자, 새로운 영역을 찾아 나서는 사회과학 출판계의 움직임을 그들의 입을 통해 직접 들어본다.
◇김언과씨(한길사 대표)=오래 전부터 급진좌익계열 책은 출판을 피하면서 다변화를 꾀해왔다. 이때문에 보수화됐다는 비판도 많이 받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우리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든다. 출판의 흐름은 사회의 변화와 궤를 같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의 변화를 날카롭게 전망하면서 대중성과 엘리트주의를 조화시키고 종합성을 확보하는것이 중요하다.
종합성 확보의 일환으로 6개월 전부터 『청소년도서시리즈』1차분 4백권의 도서목록작성작업을 마쳤다.
◇김명인씨(풀빛 계간지 『사상문예운동』주간)=87년 이후 우리 여건에 기초한 국내 필진의 연구서가 대거 선보이기 시작했다. 대중화·다변화를 통해 재정적 기반을 다진후 이같은 토착적 연구서 발간에 집중투자할 계획이다.
안 팔리더라도 꼭 나와야 할 사회과학책은 우리가 낸다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한국현대사』 3, 4권을 완간하고 일반교양서 수준의 세계사와 어린이를 대상으로한 『이야기 세계사』도 기획중이다.
◇김종말씨(한울 대표)=한때 붐을 이루었던 이념서적의 특수경기가 국내외정세에 영향받아 사라져가는 것은 당연한 추세다.
인문·사회과학 도서의 주된 고객은 일반독자들이 아니라 도서관들과 소수의 연구자들인 세계적인 양태다.
앞으로 「다종 소부수」출판을 원칙으로 사회과학 도서를 계속 내는 한편 컴퓨터등 정보서적과 지리·건축학등 자연과학 분야에도 관심을 기울일 예정이다.
◇김철미씨(백산서당 대표)=그동안 인문·사회과학 도서들이 번역 위주로 졸속 제작돼온게 사실이다. 건강한 시각을 갖춘 일반 독자층이 두터워졌고 전문적인 이론서보다 현실생활에 쓰임새 있는 실용서에 대한 요구도 대단히 높아졌다. 이에따라 출판사의 지향점도 달라지고 있다.
실용서를 많이 발간, 독자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는 한편 양심적인 시민들이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어나가는데 필요한 좋은 책을 오랜 시간을 두고 공들여 제작하겠다.
불황타개를 위해 변신을 서두르는 사회과학 출판사들의 바쁜 발걸음을 살펴보자.
풀빛출판사는 오래전부터 『풀빛판화시선』『풀빛소설선』을 펴내 이미지를 탄력적으로 바꾸는데 성공했다. 그후 『이야기 한국사』『한국전래동화』『풀빛어린이시리즈』등 어린이 도서와 소설 『장길산』을 만화로 꾸미는데까지 영역을 넓혔다. 최근에는 SF소설도 기획중이다.
빨찌산운동을 주제로 한 대하소설 『태백산맥』으로 한국 출판사상 최대의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는 한길사도 이를 계기로 작년 월간지 『한길문학』(계간으로 바뀜)을 선보이면서 문학분야에 본격 진출했다.
올들어 시집 6권과 제3세계 소설 여러권을 번역, 출간한데 이어 국내외 추리소설도 곧 선보이는등 문학쪽에 대단한 의욕을 보이고 있다.
또 몇몇 출판사는 또하나의 자매출판사를 만들어 기존 이미지는 보존하면서 새로운 영역을 효과적으로 넓혀나가는 2원화 전략을 마련.
백산서당은 산하에 기업경영관련서및 SF소설을 주로 퍼낼 한국정보문화사를 신설, 첫책으로 『기업문화전략과 CI』『아시모프의 파운데이션』(전5권)이란 SF소설집을 선보였다.
거름출판사도 최근 홍익기획을 설립, 『만화로 보는 자동차응급처치법』을 냈다.
그밖에·사계절·동녘·한울출판사등도 문예물쪽으로 무게중심을 서서히 옮겨가면서 출판영역의 다변화를 통해 종합출판사로 약진하는 각개전투에 여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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