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5년 외길 인생 심상용씨 "영화는 내 운명"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춘천 Y극장에서 심상용(61)씨를 만났다. 인근에 생긴 복합상영관 때문인지 극장주변은 한산했다. 복합상영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깔끔한 인테리어와 조명으로 리모델링을 마쳤지만, 지난해 말 결국 Y극장은 문을 닫고 말았다. 이제는 기억 속의 장소로만 남은 Y극장. 이곳에서 30여년 영사기사로 일한 심씨를 만났다.

"객석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내겐 활력이지."

400석 규모의 상영관 안에 조명이 하나 둘씩 꺼지기 시작한다. 관객이라 봐야 5명이 전부. 영화가 시작되고 가끔씩 들리는 희미한 웃음소리만이 어둠의 정적을 깬다. 스크린 반대편에 위치한 영사실 유리창을 통해 한 남자가 객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희끗희끗한 머리에 빵떡모자를 눌러쓰고 주름진 눈가에 돋보기안경을 걸친 심상용씨.

그가 일하고 있는 2층으로 올라가 낡은 쪽문을 열자 세로로 길게 뻗은 5평 넓이의 공간 안에 어른 키만한 '포드' 영사기 한 대가 '촤르르 ̄' 소리를 내며 쉼 없이 돌아간다. 회색 콘크리트 벽은 현재 상영 중인 영화 시간표와 언제 상영했는지조차 모를 제목의 영화 포스터가 듬성듬성 메우고 있다. 흐릿한 형광등이 천장에 매달려 있지만 실내는 어두침침하다.

'빛' 대신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이곳은 심씨의 평생 작업터로, 1960년대를 풍미한 '월하의 공동묘지' '남자식모'로부터 최근의 '왕의 남자' '청춘만화'에 이르기까지 어림잡아도 400편이 넘는 영화를 스크린에 쏘아준 영사실이다.

힘차게 돌아가는 영사기와 달리 심씨는 무료한 듯 영사실 안을 서성이고 있다. 그는 "요즘은 죄다 자동화가 돼서 필름 걸고 버튼 몇 개만 눌러주면 별다른 할일이 없는 직업이 되었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늘어놓는다.

심씨에 따르면 30 ̄40년 전만 하더라도 영사실은 '한 번 들어오면 화장실도 마음 놓고 못 가는 곳'으로 악명 높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전구를 쓰는 요즘 영사기와 달리 약 30cm 길이의 '카본불'을 태워 그 불빛으로 영사를 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심씨는 "영화 2편 상영하면 카본불 심지가 닳아 없어지기 때문에 시간 맞춰 갈아줘야 하고 불빛이 흔들리면 영화도 흔들려서 나와 상영시간 내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외화의 경우 자막까지 스크린 옆으로 따로 쏴 주어야 할 때도 있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난방 시설이 부실해 겨울에는 영사실에서 손발이 다 얼도록 필름 손질을 했다"는 그는 "나가서 밥 먹을 시간조차 없어 철재 필름 통에 찌개를 만들어 먹고 그곳에 세수까지 해가며 하루 14시간씩 일했다"고 전한다. "그래도 영화는 원 없이 보았겠다"는 취재진의 질문에 심씨는 "영사기 신경 쓰느라 바쁜데 영화가 눈에 들어오겠느냐"며 "벤허나 아라비안 로렌스, 닥터 지바고 같이 3시간이 넘는 대작을 상영하는 날에는 손에 쥐가 나곤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원초적 본능'의 샤론스톤처럼 1960년 당시, 한국의 섹시 심벌로 군림했던 도금봉 주연의 1963년 작품 '또순이'로 본격적인 영사기사로서 삶을 시작한 심씨가 처음으로 영화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61년.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어 학교는 애당초 생각지도 못한' 15살의 그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자전거를 타고 극장과 극장 사이에 필름을 배달(일명 가케모치)하는 일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필름이 무척 귀해 전국에서 상영되던 영화의 원본 필름은 보통 7개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때문에 적은 수의 원본 필름을 돌려쓰다보니 영화 한 편이 전국을 다 도는데 3년이 걸린 경우도 있었다고.

"동시 상영은 고사하고 전국에서 돌려가며 사용하니 가뜩이나 질 나쁜 필름이 닳고 닳아 상영 도중에 끊기기 일쑤"였다는 심씨는 "끊어진 필름의 끝부분을 사포로 문지르고 아세톤으로 붙여 외관상으로는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도 큰 일 중의 하나였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끊어진 필름을 반복해서 잇다 보니 '결정적인 컷'이 사라져 관객의 야유를 받기도 했다는 점이다. 심씨는 "상대방이 총도 안 꺼냈는데 바로 주인공이 쓰러지거나 죽어버리고 주먹으로 때리지도 않았는데 얼굴이 퉁퉁 멍이 들었다면 상상이 가느냐"고 되물었다.

국민배우 안성기가 어린 소년으로 열연했던 '어머님 안심하소서'를 아직까지 기억하는 그는 '실미도'에서 40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은 안성기의 중년 모습까지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는 영사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전국 팔도 영사실에 나한테 배운 사람 한명씩은 꼭 있을 것"이라는 그는 "현재 서울에서 잘나가는 M멀티플렉스 영사실장도 내 제자"라며 자랑스러워한다.

영사업계에서는 '선생님' 소리를 이골이 나도록 듣는 심씨이건만 정작 그에게는 아직까지 영사기사 자격증이 없다. 한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씨는 "실기는 늘 만점인데 그 놈의 필기시험이 언제나 말썽"이라고 아쉬워하며 "필기는 60점만 넘으면 합격인데 딱 4점이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슬쩍 귀띔한다.

이제는 아무도 영사기를 잡으려 하지 않는 세태 속에 '눈물과 웃음'을 전달하는 영사기사로 살아온지도 어느덧 45년. "후회도 미련도 없다"고 말하는 그이지만 가족들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한다. 특히 평소보다 더 바빠지는 연휴 때만 되면 너무도 미안한 마음에 말을 할 수조차 없단다. 남들 쉬는 날이 대목인 관계로 "가족들하고 그 흔한 떡국같이 한 번 못 먹어 봤다"는 그의 말에서 지난 인생역정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올해로 환갑을 넘겼다"는 심상용씨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딴 영화박물관을 만드는 제2의 인생을 설계 중이다. 부지와 장소 문제만 해결되면 45년간 어렵게 모아온 수백 장의 희귀 영화 포스터, 보물과도 같은 영화 필름, 그리고 지금은 자취를 감춘 8mm, 15mm 영사기와 같은 구시대적 유물들을 전시할 계획이다. 여기에는 6.25당시 종군기자가 직접 찍은 반공영화 '아! 잊으랴'와 같이 이제는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필름도 포함되어 있다. "가끔씩 영화마니아들이 찾아와 높은 가격을 제시하며 팔라고 애원하지만 꿈을 돈과 바꿀 수야 없지"라고 말하는 심씨는 "돈으로 따지면 50년대 영화 포스터가 최곤데, 그 귀중한 걸 동네 사람들이 예쁘다고 알게 모르게 가져다가 도배지로 죄다 썼다"며 아쉬운 듯 허허 웃었다.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를 꿈꾸며 평생을 영사실에서 보낸 심씨는 "영화가 인생에 전부였기에 인생의 마무리 역시 영화를 통해 하고 싶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객석에 앉아 있는 단 한 명의 관객도 소중하다"는 그의 말 깊은 곳에서 몸도 마음도 언제나 영사실로 향해 있는 그를 본다.

신동민.이혜경 대학생 인턴기자 whoaui@hanmail.ne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