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장관|정부-정당의 징검다리 역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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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88년2월 6공화국 출범 이후 정무장관을 역임했거나 재임중인 김윤환·이종찬·정종택·박철언·김동영·최병우씨 등의 민자당 내 위상을 보면 정무장관 자리의 무게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월계수회와의 결별 등으로 위상이 과거 같지는 않지만 박철언씨는 한때 정부·여당의「실세」로서 민정계의 차기 대권 후보로까지 거론되기도 했다.
월계수회로 거센 비판을 받았던 박씨는 정무장관 시절(89년7월∼90년4월) 정호용씨 의원직 강제사퇴 등 5공 청산 마무리 작업, 노태우 대통령에 대한 중간평가 연기 및 3당 통합과 정계 개편작업에 깊숙이 관여했다.
박 장관은 90년 시무식에서 『앞으로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 벌어질 터인 만큼 정신 바짝 차리고 업무에 임하라』는 요지의 새해 첫 연설을 했는데 이는 바로 3당 통합에 따른 정계개편을 예고한 것이다.
실제로 3당 통합과 통합직후 민자당의 결속방안 등 기본적 자료들도 정무장관실에서 준비하곤 했다. 방북설과 싱가포르에서 북한의 한시해와의 회동 등 북방정책과 관련된 박 장관의 활동과 그에 따른 비판도 이 시절 언론의 중요한 관심사였다.

<3당 통합 등 관여>
따라서 언론사 정치부기자들이 거의 매일 정무장관실과 그의 집을 체크하곤 했다.
정무장관실 관계자들은 이 시절의 정무장관실이 매스컴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론의 비판을 받던 박 장관은 90년4월 김영삼 민자당대표의 방소와 관련, 자신의 방소가 『수행 아닌 동행』이라는 발언으로 결국 민자당 내분과 함께 장관직을 떠나고 만다.
박철언씨의 장관직 후임으로 부임한 김윤환 장관은 6공 출범 당시인 88년 3월부터 약 2개월 동안 6공 초대 정무장관직을 맡은바 있어 그의 말마따나 「재수」를 했다.
김 장관은 김영삼 민자당대표와 박철언씨의 싸움으로 골이 깊어진 민자당내 민정·민주계의 화합과 아울러 4당 체제하에서 제1야당의 위치를 한껏 즐기다 하루아침에 위상이 급격히 평가 절하된 평민당과의 관계개선에도 나름대로 노력했다.
당시 평민당은 국회 내에서의 대여공식 창구인 김동영 민자당총무를 「변신자」로 몰아붙이며 그를 기피했기 때문에 김윤환 장관이 대야 접촉에 많이 나섰다.
김 장관은 5공 말기 청와대 비서실장직 등을 맡은 인연 등으로 김대중 평민당 총재를 직접 만나기도 했다.
김씨는 특유의 친화력으로 정무장관시절 당정간 또는 여야간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는 일종의 「해결사」 역할에 남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 부임해 올7월까지 약9개월간 재임했던 김동영 장관은 3당 합당으로 여당이 됐으나 오랜 야당생활에 뼈가 굵은 민자당 내 민주계 출신 의원이어서 출발부터 입장이 전임자들과는 달랐다.
지난해 3당 합당 후 민자당은 민정·민주·공화계가 사무총장·원내총무·정책위의장 등 당 3역을 계파별로 하나씩 나눠 가졌으나 지난해 10월 당정개편으로 당 3역을 모두 민정계 의원이 차지하고 민주계가 맡고있던 각료들도 모두 물러남으로써 김동영 장관은 당정을 통틀어 민주계 출신의 유일한 공식 창구가 됐다.
김영삼 민자당대표의 오랜 측근으로 김 대표의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던 김 장관은 노태우 대통령과의 관계도 원만해 노 대통령과 김 대표와의 원활한 관계유지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오랜 야당생활로 공안당국 등의 수사와 탄압을 받아왔던 김씨는 장관이 되자 안전기획부·경찰 등 주요 공안당국의 각종 정보보고서를 매일 받아보게 되자 『격세지감을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정무장관실 관계자들은 김 장관과 박철언 장관이 여러 점에서 많은 대조를 보였다고들 한다.
박씨가 빠른 두뇌회전과 명석한 논리를 펴는 철저한 참모형인데 비해 김씨는 논리적·조직적이지는 못하지만 통이 크고 포용력이 있으며 선이 굵고 정치감각도 뛰어났다고 평가한다.
김씨는 특히 교류범위가 넓고 사람을 깊이 사귀는 의리형이어서 정무장관실에는 각계각층의 손님이 넘쳤다고 말한다.
그러나 김씨는 당뇨병 등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사표가 수리되기 한달 전부터 병원에 입원했으며 그간의 업무는 윤여준 차관이 처리하기도 했다. 현직 장관이 한달씩이나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아도 큰 지장이 없는 부서라는 또 다른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무장관실 간부들은 민주계의 김동영 장관이 등용될 때 업무추진에서 김영삼 대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어 장관을 보좌하거나 기초자료를 만들 때 여러 가지 고려를 해야 하는 고충을 우려했으나 실제로 그런 일은 많이 일어나지 않았다고들 한다.
김 장관의 후임으로 박준병·정순덕 민자당 전 사무총장 등이 거론됐으나 결국 이들 민정계의원이 아닌 민주계의 최형우 의원이 낙점을 받은 주요한 이유중의 하나도 이 자리가 현재로서는 민주계가 맡고있는 유일한 공식 당정창구라는 점 때문이다.
정무장관실 관계자들은 국회의원 선거구 조정 문제 등 굵직한 정치현안들이 산적한 시점에서 또다시 민주계의 최 장관이 임명된 것에 신경을 쓰면서도 솔직 담백하고 직선적인 최 장관이 4선의 중진의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노태우 대통령도 5공 시절인 81년7월부터 82년3월까지 8개월 동안 정무 제2장관을 지냈으나 노 정무장관은 올림픽유치와 준비 및 체육부 창설 등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노 대통령도 거쳐>
정무장관실 관계자들은 『현직 대통령(노태우), 차기 대권후보자(이종찬), 차차기 대권후보자(박철언) 등이 모두 정무장관 출신임을 보면 정무장관의 외상을 실감할 것』이라고 말할 정도다.
5공 전반기에 이 자리에 앉았던 정종택·오세응·이태섭씨 등은 당시 야당을 「제도권 정당」으로 평가했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정부의 국회에 대한 일방적 우위와 여야 원내총무간의 관계가 원활해 사실상 그 역할이 미미했다.
그러나 5공 후반기의 정재철 장관은 정치활동 규제자의 대폭해제와 김영삼·김대중씨의 정치활동재개 및 85년 2·12총선(12대)으로 「자생적 야당」이 출현함에 따라 여야간 극단대결 양상이라는 정치적 상황 변화에 전반기와는 달리 활발한 활동을 했다.
이 당시 정무장관실 보좌관이 1급에서 차관급으로 격상되고 정무장관은 여야간 대화를 촉진하는 적극적 교량역할을 했다. 야당에 밝은 정재철 장관은 당시 신한민주당 이민우 총재와의 잦은 회동으로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재임기간 2개월의 단명으로 끝난 조기상 장관에 이어 부임한 이종률 장관은 5공의 마지막장관으로 민화위 노태우 대통령 취임준비위 등과 연락관계를 주요임무로 정권교체에 따른 일을 맡았다.
제1공화국 시절 현재의 정무장관 전신인 무임소국무위원은 상징적 자리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초대 이청천 장관은 불과 두 달만에 스스로 사임했고 3대 박현숙씨가 물러난 54년 이후로는 4·19혁명으로 제2공화국이 출범할 때까지 계속 공석으로 있었다.
장면정권이 들어서면서 당시 민주당 신파의 중진이던 김선태씨가 임명되면서 이 자리는 정치적 의미가 강해지기 시작해 신파의 총 참모장격인 오위영씨가 61년1월 개각 때 임명되자 절정에 달했다.
제3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무임소장관으로 명칭이 바뀌고 원용석·김윤기·황종률·이병옥씨 등 경제통이 제2무임소장관으로 입각해 경제참모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3선 개헌 후 4인체제의 실력자 길재호씨가 임명되면서 갑자기 힘이 무임소장관실로 몰려 이곳을 거치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한때 막강한 위치를 구축하기도 했다.

<길재호씨 막강>
길씨에 이어 오치성·이병희·신형식·김용태씨 등 공화당의 실력자들이 임명돼 박정희 대통령 주재의 청와대 정무·여당연석회의를 사실상 주도했다.
당시에는 정부와 집권당간의 창구역할을 무임소장관이 「실질적으로」했기 때문에 무임소장관실을 거치지 않고는 각 부처가 법안하나 국회에서 제대로 통과시킬 수 없었던게 사실이다.
여성관련업무 총괄부처로 6공화국 출범과 함께 성격이 바뀐 정무 제2장관은 이계순 현 장관까지 3명의 장관이 모두 여성이었다.
초대 조경희 장관(88년2∼]2월)은 지난 52년 박현숙 장관(당시는 무임소 국무위원)이래 36년만에 임명된 여성장관으로 여성관련업무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 분야 중 노인·청소년·아동·문화예술 분야까지 담당했다.
여기자 클럽회장·예총 부회장·여류문학인 회장 등 다양한 경력의 조 장관은 여성의 지위 향상과 남녀차별 해소를 위해 호적·상속·동성동본 금혼 문제 등과 관련한 가족관계법의 단계적 개정 및 여성의 고용확대를 위해 남녀고용평등법의 철저한 이행 등을 강조했다.
한국여성개발원장·12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을 역임했던 후임 김영정 장관은 북방정책의 흐름에 발맞춰 공산권 여성과의 교류강화는 물론 민간 여성차원의 남북활동을 지원하고 북한여성 실태 파악과 홍보에도 힘을 기울였다.
서울대교수로 여성유권자연맹회장을 역임한 현 이계순 장관은 가족법개정, 특수대학에서의 남녀 입학제한 철폐, 지방 공무원 채용 시 남녀 구분 철폐, 은행원 성별모집 철폐 등 창설 3년여의 결실을 하나씩 거두는 중이다. <박병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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