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분자 구조 하나가 세계사를 바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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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1519~22년 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할 때 선원의 90% 이상이 괴혈병으로 숨졌다. 신선한 과일이나 주스를 먹지 못해 비타민 C가 부족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아스코르브산(비타민 C) 결핍은 대항해 시대의 막을 내리게 했단다.

납 용기에 음료를 저장하고, 납 파이프로 물을 공급해 로마가 납 중독으로 멸망했다는 가설은 이미 유명하다. 로마인들은 그것으로도 모자라 납 성분이 포함된 최초의 인공감미료 아세트산납을 포도주에 첨가해 단맛을 즐겼다고 한다.

단맛을 내는 화합물 포도당(C6H12O6)을 구하느라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 흑인이 아메리카 대륙의 사탕수수 농장에 노예로 끌려갔다. 인공감미료가 개발된 뒤 설탕 수요가 줄어들긴 했지만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 포도당으로 이뤄진 중합체인 셀룰로오스는 면섬유의 성분이다. 면화(셀룰로오스)는 19세기 영국 산업혁명과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이 됐다. 그 응용 물질인 나이트로셀룰로오스는 폭약과 사진, 영화 등의 새로운 산업과 합성섬유를 탄생시켰다.

지은이는 중세 시대의 마녀 사냥에도 화학식을 대입한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았다'는 이야기는 여성들이 환각제 성분을 지닌 알칼로이드류의 생약을 몸에 바르면서 경험한 환각 때문에 나왔을 것이라고 본다. 문제의 알칼로이드 분자가 포함된 작물(양귀비.담배.차.커피)은 무역을 활성화하고 쿠데타 자금을 공급했으며, 국가간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역사적으로 귀하고 비싼 상품이었던 소금은 무역.독점.전쟁은 물론 인구 이동과 산업 발달을 가져왔다. 그러나 화학자들의 노력으로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너무나도 흔한 물질이 됐다.

캐나다에서 30여 년간 화학 교수로 재직 중인 지은이는 이렇게 화학이 역사를 바꾼 17가지 장면을 흥미롭게 설명한다. 역사를 바꾼 과학 이야기는 여러 책에서 소개됐지만 화학에만 초점을 둔 책은 흔치 않다. 마냥 복잡하고 골치 아파 보이는 화학이 어떻게 인간의 생활과 연결되어 있는지 깊고도 넓게 보여준다. 화학식도 종종 삽입되었지만 설령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전체적인 맥락을 읽는 데에는 지장이 없을 듯하다. 분자 구조의 조그마한 차이로도 인간사에 큰 변화를 가져온다는 원리만 이해해도 충분하다.

이경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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