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대표의 선택/전육(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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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노태우 대통령이 기분좋게 미국·캐나다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지 닷새만인 지난 11일 오후. 청와대 대통령접견실에서는 가을정국의 향방을 가름할 의미있는 담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대통령과 마주 앉은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동안 기회만 엿보아 온 흉중의 최대현안을 꺼낸 것이다. 정치일정과 민자당의 차기대통령 후보지명 문제­.
김대표의 주장은 대충 이러했다. 임기 1년전쯤(92년 2월25일) 후계자를 가시화하겠다고 한 대통령의 몇차례에 걸친 공언도 있었고 하니 내년 2월에는 후보지명을 위한 전당대회가 꼭 열렸으면 좋겠다. 그 여세를 몰아 4월께 14대 총선을 실시하자면 적어도 금년 11,12월에는 민자당의 대통령후보가 내정되어 국민에게 알려져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노대통령의 답변은 기다렸다는 듯이 정연하고 단호했다.
대통령후보 지명은 당헌에 의해 민주적절차(경선)을 거쳐 적절한 시기(14대 총선후)에 하는 것이 순리다. 나의 임기가 1년7개월이나 남은 지금은 정치일정을 논의할 시기가 아니며 정부와 당이 단합된 모습으로 국리민복을 위해 매진해야 할 때다. 정치일정문제는 당총재인 나에게 맡겨달라.
더이상 논쟁은 이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침묵으로 서로의 의중을 전했고 피차 상대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교감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양쪽의 얘기를 종합해보면 노대통령측은 정치일정에 관한한 김대표가 섣불리 넘보지 말고 대통령의 처분을 조용히 기다리는 2인자의 입장에서 집권말기 레임덕(권력누수현상) 방지에 협조하라는 통보에 비중을 둔듯 하다. 반면 김대표측은 노대통령의 수락여부와는 관계없이 정치일정에 대한 대표의 목표와 의지를 분명히 전달한데 뜻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어쨌든 노대통령은 현단계에서 자기가 가장 전념해야할 일은 집권말기를 통치권의 누수없이 마무리짓는 것이며 후계자결정 문제는 최대한 시기를 늦춰 잡겠다는 복안이었다. 그나마 누구의 요구에 의해서 보다는 자신이 선택하는 절차와 방법으로 해결할 것이며 최후 순간까지 공식적으로 김대표가 유일한 후계자란 의사표시는 할 수 없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김대표의 입장은 확연히 다르다. 참고 기다릴 것이 따로 있지 연내 후보지명 문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물러설 수 없는 자신의 정치적 사활이 걸린 요구라는 점이다. 3당합당의 포괄적 정신이나 김대중씨와 맞서 정권을 재창출해야 하는 민자당 스스로의 당위성에서 볼때 자기외에 후보는 현실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며 가급적 조기에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이 오히려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을 줄이는 방편이란 주장이다.
이같은 대치는 이미 논리의 공방차원을 넘어선 것 같다. 7·11회동후 벌어지고 있는 노­김대중 회담에서의 내각제 재론,민정계의 반YS라인 강화와 대선거구제 제기 등은 명분이야 어떻든 노대통령에 의한 김영삼 견제 의도가 저변에 짙게 깔려 있다. 특히 최근의 힘겨루기에는 전례없이 노대통령의 영향력이 직접 작용하는 기미가 있다.
그러나 김대표측은 노대통령의 배후작용을 단정할 수 없는 단계에서 맞대결하는 것은 실익이 없다는 판단인듯 하다. 그렇지만 노대통령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할 경우 금년 가을에는 공멸까지를 각오한 대회전이 불가피함을 김대표 스스로 부인하지 않고 있다.
전두환­노태우 관계와 노대통령과 자신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노대통령을 믿고 내년까지 기다릴 수 없다는 것이 거의 확고부동한 김대표의 결심이다. 그는 장기이기도 한 적중률 높은 강수를 쓰기 위해 이미 준비에 착수한 느낌이다.
이 게임에 김대중 신민당 총재가 개입을 마다할리 만무하다. 민자당의 분란과 힘의 향배는 바로 그의 이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금년 가을은 1노2김의 합종연형과 정치적 술수들이 난무할지 모른다. 상대방을 둘러치고 실수를 유도하기 위한 전략들­.정상적 경쟁윤리가 무시되기 십상인 이 격투의 겉모습에 현혹당하지 않기 위해선 이제 국민들의 판을 읽는 안목이 높아져야겠다.
예를 들면 노­YS간 쟁점인 통치권 누수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임기가 끝날 무렵,통치의 효율성이 어느 정도 저하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만국 공통의 현상이다. 따라서 행정의 비효율성을 줄이겠다는 것과 권력의 누수를 막겠다는 것은 성격이 다르다.
임기끝까지 권력을 안놓고 퇴임후의 영향력을 고려하는 것은 일반적 레임덕 문제와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는 그같은 예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우에서 보았다.
몇월 며칠까지 대통령권한을 똑같은 강도로 행사하겠다는 집념이 레임덕을 막기 보다는 후임자와의 틈을 벌린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퇴임후 문제는 재임중 당당한 국정집행으로 대응하는 것이 정도가 아닌가 싶다. 독재 안하고,뒤가 켕길 구석없이,큰정치 하고 떠나는데 사후를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또 당내경선은 바람직한 민주절차다. 정당한 경쟁을 무시하고,대권을 몰락한 양반집에 들어가 족보챙기듯 거머쥐겠다는 발상은 옳지 않다. 다만 경선이 경선답게 되려면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국가경영의 비전과 개혁의지에 관해 대타들이 제목소리를 들고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반YS의 우산에 웅크리고 앉아 노대통령의 조종이나 낙점을 기다리는 것은 민주화를 지향하는 정당으로서는 떳떳지 못한 경선일 뿐이다.
3당통합 자체가 사적인 동기와 공적인 목표가 변칙적으로 접목된 것이었던 만큼 그 이후 민자당에서 일어나는 제현상을 일반론으로 치장하는데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노대통령과 김영삼 대표의 기본입장에 절충가능성이 발견되지 않으면 이번 가을의 대회전은 그 파열음과 파장이 가위 메가톤급이 될 것이 틀림없다.<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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