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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길재의 절의 숨쉬는 탐치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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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질고 지혜로운 이들은 스스로 바깥세상과 인연을 끊고 산 깊은 곳에 묻혀 살았다. 더구나 나라가 어지럽고 세상에 나아가는 것이 목숨을 버리는 것만 같지 못할 때, 지성인으로서의 바른 생각이 꺾이지 않을 수 없을 때 몸을 숨길 곳을 찾아 바람소리·물소리에 마음을 담그고 살았었다.
우리의 선인들은 두 왕조를 섬기거나 두 임금을 섬기는 일을 씻을 수 없는 치욕으로 여겨왔다. 벼슬에 나아가 영화를 누리기보다는 초야에 묻혀 자기 공부를 하는 일을 더 큰 기쁨으로 삼아왔다. 저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조선왕조가 일어서는 역사적 변혁기에 이름을 다 들출 수 없는 수많은 선비들이 산으로 들어갔거니와 그 가운데에서 가장 드높은 절의를 실천한 분이 치은길재다.

<외조부 품서 자라>
산업사회로의 전환과 더불어 새롭게 태어난 구미시는 해발 9백76m의 금오산의 꼬리에 붙어있다. 백두의 탯줄을 타고 내려와 우뚝 솟은 이 산은 흩어져 있는 신라대의 유적 금오산성 등이 장엄한 역사를 증언하고 있거니와 그 빛을 더하는 것은 치은이 끼친 절의가 하늘에 닿기 때문이다.
길재의 본관은 해평으로 고려 공민왕2년(1353년) 경상북도 선산군 고우면 봉한리 외가에서 중정대부지금주사의 벼슬을 하는 원진의 아들로 대어난다. 그의 외조부 김희적은 판도판서로 추봉된 선비인데 길재는 어려서 외조부의 품에서 자란다.
아버지 원진이 어머니와 함께 임지로 떠나 살게되어 그가 남달리 부모의 정을 그렸음은 여덟살 때 지었다는 시『가재(석해)』에서 잘 드러난다.
가재야 가재야
너도 엄마가 없니
나도 엄마가 안 계시단다
구워먹고 싶지만
나처럼 엄마가 없는 것 같으니
그냥 보내 주마
어린 길재의 이 시는 마을노인들을 감동시켰고 예사로운 아이가 아님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5세 때 냉산의 도리사에서 글공부를 해서 그의 시는 더욱 깊어졌다. l6세때 지었다는 『한거』는 그의 시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미리 내다보게 한다.
시냇가 오두막집
홀로 한가롭다
밝은 달 맑은 바람
흥이 절로 나고
찾아오는 이 없이
산새들만 지저귀는 구나
대 숲에 상을 옮기고
누워서 글 읽는 즐거움이여
18세에 그는 이웃 고을 상주의 사녹으로 있는 박비(박분)를 찾아가 사서삼경을 읽고 성리학에 눈뜨게 된다. 그는 부모를 섬기지 않는 것은 자식된 도리가 아님을 깨닫고 서울 송도로 가서 부모를 봉양하면서 당대의 큰 학자들인 이장, 정몽주, 권근 등의 가르침을 받게 된다.
과거에도 응시, 생원·사마·진사 등에 합격했고 이 무렵 뒷날 대종이 되는 이방원과 만나 학문을 논하는 사이가 된다. 1388년 성균 박사가 되어 길재의 가르침을 받고자하는 수재들이 줄을 이었다. 이해에 조정에서는 요동(요동) 을 칠 계획을 세우자 그는 어떤 예감을 하는 시를 짓는다.
용수산 동쪽에 담장이 기울고
미나리 밭에 수양버들 드리웠네
몸이야 비록 남다를리 없건마는
뜻만은 백이(백이) 숙제(숙제)
굶주리던 수양산에 가 있네.
공양왕1년 (1389년) 길재에게 문하주서의 벼슬이 내려진다. 그러나 노모를 모신다는 핑계를 대고 낙향을 서두른다. 이미 고려왕조의 해가 서산을 넘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금오산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은 이장을 찾아 뵙는다. 목은은 시를 주되 「벼슬은 뜬구름 집착하지 말게나/저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게 그려」를 끝 구절에 담는다.

<금오산 기슭 낙향>
그 길로 돌아와 세상과 담을 쌓고 이 금오산에 몸을 숨긴다. 그의 나이 38세 때의 일이요, 이성계가 역성(역성)혁명을 일으키기 두해 앞의 일이었다. 조선조가 들어서고 정종2년 (1400년)길재는 함께 글공부한 이방원의 천거로 대상박사에 제수 되나 그는 간곡하게 사양하는 글을 올린다.
「백이 숙제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주나라의 양식을 거절하지 못했으니 명분과 의리를 잃었고 절개마저 꺾였으니 형벌을 내려 두마음을 품는 신하를 부끄럽게 여기도록 함이 지당하거늘 어찌 망국의 못난 포로가 조정의 벼슬을 하겠습니까」라고 불사이군의 절의를 말한다. 두 번 째 글에서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까닭은 절개를 지키자는 명예를 얻고자함이 아니라 산골에 살며 소요하고자 함」이라고 거듭 사양한다.
길재의 절의는 태조 이성계도 감복해 「금오산 한쪽 땅은. 내것이 아니구나(금오일구비아소유)」라고 휘호를 내렸으며 세종도「고려의 충절은 포은(정몽주)과 치은」이라고 찬양해 마지않았고 숙종도 친히 시를 써 후세에 기리게 한다.
벼슬을 버리고 금오산에 돌아오니 맑은 정신 엄자릉에 견주겠네 어진 임금은 그 아름다움을 쳐들어 세상에 절의를 일으키리라. (귀와오산하 청풍비자릉 성주성 기미 근인절의흥)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대신 부모나 스승에게는 도리를 다했으니 그가 스승 권근·박분 등의 상을 당했을 때 3년 상을 치른 것 등은 유가의 상례를 따른 것이었고 조선조에 그 법통을 잇게 한 것이었다.
그는 고려말의 거차유인 이장·정몽주를 사사했고 더욱 양촌 권근의 학통의 맥을 이어 김숙자· 김종직· 김굉필· 조광조 등 조선조 초기의 학자들에게 한국 유학의 전통을 심어준 큰 학자요 시인이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 시조는 정몽주의「이 몸이 죽어죽어…」와 더불어 이 나라 사람이면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표적 민족시다. 어느해 그는 늙은 몸으로 옛 서울송도를 찾았을 것이다. 거기서 그는 허물어진 5백년 왕업의 무상함을 이렇게 노래했으리라.

<수많은 저작 실종>
세종1년(1419년) 길재는 67세로 이 금오산 기슭의 오두막에서 임종한다. 아쉬운 것은 그가 금오산에 30년 가까이 은둔하면서 써놓았을 경학의 이론과 시문들이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철종 때 꾸며진 「치은속집」과 「치은언행습유」는 그가 생전에 이룩했던 방대한 저작의 이삭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구미시청에서 5리쯤 가면 금오산 오르막길에 「채미정」(구미시 남통동249)을 만나게 된다. 우러러보면 푸른 안개가 이는 현월봉이 솟아있고, 굽어보면 금오 저수지에 놀잇배가 둥실 떠있다.
이 채미정이 바로 길재가 은거하던 집터가 된다.
영조44년(1768년) 에 길재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새로 집을 짓고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캤다는 고사를 빌러 이름도 채미정이라고 했다. 또한 금오산도 길재가 백이숙제가 들어갔던 수양산을 그렸다하여 수양산이라고 불리기도 했었다 하나 오늘 수양산은 있고 채미정은 있어도 본받는 이가 없음이 슬픈 일이다.
채미정은 1876년 말끔히 단장되어 구인재·경모각·흥기문과 견허비각 등이 있고 숙종 어필과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채미정을 참배하고 곧바로 금오서원을 찾아 선산으로 달려간다.
명종22년(1545년) 길재의 학덕과 충절을 길이 모시고자 최응룡이 세웠던 금오서원이 임진왜란 때 소실되자 선조35년(1602년) 선산의 남산에 다시 세운 것이다. 선산군청에서 동남쪽으로 10리쯤 가면거기 감천이 낙동강과 맞닿는 곳 남산기슭에 금조서원이 추녀를 높이 올리고 서있다.
선조8년·광해군 원년에 두 차례나 사액이 내려진 이 서원은 김종직·정붕·박영·장현광 등 조선조의 한 봉우리를 이룬 학자들을 추향하고 있다.
다락문을 들어서 서원 뜰에 비를 맞은 원추리가 활짝 피어 꽃밭을 이루고 있다. 길재선생이 이걸 보시면 또 시 한 수 얻으실 것을. 【시인 이근배·사진 김주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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