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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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달 30일 팔당대교 아래에서 급류에 휩쓸려 허우적 거리고 있는 아이들 3명을 구하고 자신은 지쳐 물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숨진 청년 양필석씨의 추모비 건립을 위한 성금이 답지하고 있다. 모금 당일만 해도 1천만원이 넘는 금액이 모아졌다고 들린다.
그 이후로도 각 언론기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의로운 살신성인 행위를 기리는 사업에 동참하려는 행렬이 끊이지 않고 있다.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 성금의 액수가 아니라 성금을 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정성스런 심리다.
그것은 누구나 감히 하지못하는 비범한 선행에 대한 존경과 예우의 뜻이 담겨있다. 또 유족들을 위로하고 생계에 기여하겠다는 배려도 포함돼 있다.
이밖에도 잠재의식 속에는 자신의 무력함과 비겁함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나라면 그런 상황에서 물에 뛰어들 수 있었을까 하는 일자괴감은 당시 현장에서 구경하고 있었던 군중들의 공통된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감정은 이웃집에 침입한 강도를 때려잡은 시민의 얘기같은 것을 들을 때도 어쩔 수 없이 스며드는 감정과 유사한 것이다.
양씨는 젊디 젊은 나이에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림으로써 생애는 짧지만 오래도록 경의와 귀감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반면 부귀와 영화를 누리며 오래도록 살면서도 사람들의 지탄과 눈총의 대상으로 남는 사람들도 있다.
전자보다 후자가 더 많을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제 식민통치 아래에서 친일행각을 했고 또 광복 후에도 이어 좋은 자리에서 돈 잘벌어 잘사는 사람들이다. 친일인사들은 계속 떵떵거리고 사는데 항일독립투사나 그 후손들은 되찾은 조국에서 대부분 몰락의 길을 가야했다는 것은 순전히 정치의 잘못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야 괴로운 구석이 없겠는가 마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전락』의 주인공 클레망스는 다리위에서 투신자살하려는 여인을 못본척하고 구하지 않았던 경험으로 평생을 자조속에 살면서 인간의 위선을 공격한다.
세상사람 누군들 한때의 잘못이 없을까 마는 참회와 선행이 뒤따르면 그 과오는 덮여진다.
한 희수의의 노학자가 최근 젊은 한때의 친일행적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연설을 했다해 화제다. 그의 행적과 함께 평가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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