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그룹 24시] 노루표 페인트 'DPI'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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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3면

한영재 DPI(옛 대한페인트잉크)그룹 회장은 최근 중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 사석에서 웬만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 됐다. 경기도 안양에 위치한 DPI 공장 안에 있는 각종 게시판에는 중국 관련 뉴스가 가득하다. 노루표 상표의 페인트 업체로 더 잘 알려진 DPI가 중국 진출에 고삐를 죄고 있다. 다음달 중국 상하이(上海)에 1백억원을 들여 건축 도료 공장을 준공할 예정이다. 이 회사의 첫 해외 생산기지다.

이에 앞서 상하이에 페인트 기술연구소를 세웠고 판매 법인도 만들었다. 현지에서 뽑은 중국인 직원 50명은 현재 국내에서 연수를 받고 있다.

韓회장은 최근 임원 회의에서 "중국 시장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韓회장은 한걸음 더 나아가 "필요하면 중국에 본사를 옮길 수도 있다는 자세로 중국 시장 진출 전략을 짜라"고 독려 중이다. 중국 진출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의 하나로 국내 사업에 대한 구조조정도 속도를 내고 있다.

다국적기업 페인트 업체인 네덜란드 악조노벨과 50대50으로 합작해 운영하던 국내 법인의 경영에서 손을 뗐다. DPI의 지분 50%를 지난달 악조노벨에 넘겼다. 합작 조건에 DPI가 독자적으로 분체 도료의 해외 사업을 못하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분 정리로 DPI는 중국 등 아시아 시장 진출의 걸림돌을 제거한 것이다.

DPI가 중국 진출에 발벗고 나서는 것은 국내 페인트 시장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 사업 확장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세계 유명 페인트 업체가 대부분 진출한 중국에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자는 전략이다. 중국을 전진기지로 삼아 내년에는 인도.뉴질랜드.태국 등지로 발을 넓힐 계획이다.

DPI는 '3무(無)회사'로 불린다. 1945년 창업 이래 노사분규가 한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창사 이래 적자도 내지 않았다. 특히 아직껏 사옥이 없다. 한정대 창업주는 생전에 "사옥을 지을 돈이 있으면 공장에 기계를 하나 더 설치하라"고 강조했다. 98년 韓창업주가 타계할 때까지 DPI의 안양공장에는 '나의 조국을 위하여'란 슬로건이 붙어 있었다. 제조업만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창업주의 장남인 韓회장은 경영을 승계한 이후 회사 이름을 DPI로 바꾸는 등 사업 전열을 재정비했다. 韓회장은 건축.선박.자동차 도료 등의 사업부를 각각 분사해 독립 운영하는 경영체제를 마무리했다. DPI가 지주회사 역할을 하는 경영 기반을 닦은 것이다. DPI는 14개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지난해 그룹 매출액은 8천3백17억원이다.

韓회장은 매달 한번씩 계열사 사장들과 함께 전 직원에게 경영 실적을 공개한다. DPI는 올해 지난 3분기까지 1천5백43억원의 매출에 1백30억원의 경상이익을 냈다.

고윤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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