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영화] 러브 액츄얼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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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1994년), '노팅힐'(1999년), '브리짓 존스의 일기'(2001년)… 런던의 겨울날처럼 음울한 줄로만 알았던 영국 영화의 이미지를 톡쏘는 유쾌한 웃음으로 바꿔 놓은 로맨틱 코미디의 명품들이다. 모두 영화 제작사 '워킹 타이틀'이 휴 그랜트를 주연으로 만든 작품들이다.

이 영화 세편의 또다른 공통분모는 시나리오 작가인 리처드 커티스다. 그가 시나리오를 쓰고, 처음으로 메가폰까지 잡은 작품 '러브 액츄얼리'가 다음달 5일 개봉된다. 같은 주연 배우와 제작사가 힘을 합쳐 또 다른 색깔의 사랑과 웃음을 그렸다.

리처드 커티스 영화의 특징 중 하나는 두 연인을 밀착 마크하는 할리우드 로맨스와 달리 언제나 그 주변에 개성넘치는 친구들이 한아름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특징으로는 '러브 액츄얼리'가 절정으로 꼽힐 만하다. 퉁퉁한 여비서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독신의 영국 총리(휴 그랜트)를 비롯, 10여명 등장인물의 로맨스가 거의 대등한 비중으로 교차된다.

성탄절을 한달여 앞둔 시점에 시작되는 이들의 사랑 빛깔은 그야말로 다채롭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가 있는가 하면,'위기의 남자'도 있고, 영국판'외국어 완전정복'도 있다. 사랑에 대한 가장 직설적인 대사는 깜찍하게도 초등학생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 '노팅힐' '브리짓…' 이어가

물론 등장인물이 이처럼 많다보니 그들의 사연을 너무 골똘히 따라가려다가는 지치기 십상이다. 대신 비틀스를 비롯한 다양한 음악과 웃음이 때로는 뮤지컬처럼 어우러지는 각 장면 장면을 그저 즐기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말이든 행동이든 거칠 것 없는 50대 퇴물 록 가수(빌 나이히)가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데다 결혼식이든 장례식이든 예외없이 쾌활한 팝음악이 흘러나온다.

사실 '러브 액츄얼리'는 영국산 대중문화의 종합선물세트 같은 작품이다. 영국이 자랑하는 '꽃미남' 윌리엄 왕자과 대처 총리은 농담 같은 대사 속에 거론되고, 극중 총리은 동기야 어찌됐든 미국 대통령(빌리 밥 손튼) 앞에서 '작지만 위대한 영국'을 역설한다. 블레어 총리가 부시 대통령의 애완견으로 풍자되는 현실의 영.미관계에 대한 반어법인 셈이다.

연기파 배우인 에마 톰슨과 리암 니슨은 물론이고 '브리짓 존스…'의 콜린 퍼스, '슈팅 라이크 베컴'과 '카리브해의 해적'이후 급부상한 키라 나이틀리까지 할리우드를 통해 세계에 알려진 영국 배우들이 총출동한다. 심지어는 '미스터 빈'의 로완 애킨슨까지도 카메오처럼 등장한다.

그 중에도 스포트라이트가 머무는 대상은 단연 그랜트다. 대통령과 같은 고위 정치인을 로맨스의 주인공으로 포장하려는 시도는 여러 영화에서 익히 보아온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만큼 귀엽고 매력적인 정치인은 별로 기억나지 않는다. 감독은 앞서 거론한 세 편의 영화에서 함께 일했던 그랜트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이런 역할을 만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이 정치인은 자신의 직업에 대한 대중의 냉소를 유머의 재료로 능숙하게 요리하기까지 한다.

*** 英 대중문화 종합선물세트

제목에서부터 '사랑'이 넘쳐난다고 해서 '쌍쌍관람 필수'로 지레짐작할 필요는 없다. 리처드 커티스의 로맨틱 코미디가 늘 그랬듯 이 영화 역시 사랑의 쓸쓸한 표정을 건너뛰지 않고 담아낸다. '러브 액츄얼리'가 차려내는 것은 사랑의 진수성찬보다는 지친 마음을 잠시 달래주는 사랑의 비타민에 가깝다. 비록 인물들을 런던의 히스로 공항에 모두 모아 행복한 조우를 안겨주는 과정이 아주 명쾌하지는 않다고 해도 말이다. 15세 관람가.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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