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 풍경] 0.25%와 2000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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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을 지냈던 로버트 루빈이 한국 사회에 잔잔한 파문을 던지고 있다.

최근 발행된 자신의 회고록 '불확실한 세계(In an Uncertain World)'에서 외환위기로 중단됐던 채권 발행을 재개하려는 사활(死活)의 기로에 서 있던 한국의 재경부 장관이 0.25%라는 금리차 때문에 쪽박 자체를 깨버릴 뻔했다는 일화를 소개한 것이다.

루빈은 이 일화가 1999년에 있었던 일로 소개하고 있지만 한국이 채권 발행을 재개한 것은 98년 4월 외국환평형기금채권 40억달러어치를 발행하면서 부터였다. 그 시기야 어찌됐건 40억달러의 0.25%는 1천만달러라는 계산이 나온다.

당시 한국인들에겐 단돈 1달러가 아쉬웠다. 이런 상황에서 재경부 장관이 허세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연 1천만달러라는 거금을 소홀히 했다면 그것은 치명적 직무유기다.

당시 루빈의 눈에 채권 발행 재개를 통한 '신용회복'이라는 대사(大事) 앞에 0.25%는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부분이야말로 '비(非)미국적'이어서 수긍이 가지 않는 대목이다. 왜냐하면 월가 사람들은 "협상테이블에서는 니클(5센트짜리 동전)까지도 놓치지 말고 잘 챙겨야 한다(Don't leave a nickel on the table)"는 표현을 즐겨 쓰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썩은 고기 청소부인 '독수리(vulture fund) 투자군단'은 한발 더 나아가 "(협상에 들어가서는) 단 한점의 살점도 남겨서는 안된다(Don't leave a meat on the bone)"는 협상 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이다. 뉴욕 골드먼 삭스에서 26년간 몸을 담았던 월가 출신 루빈이 0.25%라는 어마어마한 금리를 사소한 빵고물(crum) 정도로 여겼다는 것은 상황편의적인 자기모순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요즈음 미국과 또 다른 협상을 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문제가 그것이다. 미국은 5천명을 요구하고 있고 한국은 3천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그 차이는 2천명이다. 루빈과 한국의 재경부 장관이 0.25%의 금리차 때문에 옥신각신한 것처럼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과 한국 정부는 2천명이라는 숫자를 놓고 승강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0.25%와 2천명에는 공통점이 있다. '별 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는 미국적 시각에서는 더욱 그 공통점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나 이 둘 사이에는 큰 차이점 또한 내재돼 있다. 0.25%는 '순수'경제문제다. 반면 2천명이라는 숫자에는 상호신뢰, 배신감, 정치적 표 계산, 속 다르고 겉 다른 말, 잔머리에 대한 혐오감 등 각기 처한 입장에 따라 미묘하고 복잡하게 달라지는 감성적 요인들이 짙게 깔려 있다.

냉철하게 들여다 보면 "파병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다. 일단 파병을 결정한 이상 "3천명이냐, 5천명이냐"는 부차적 문제에 얽매어 손해 볼 이유는 없다. 많이 보내면 적게 보내는 것보다 효율적이고 조직적인 운용으로 우리 장병이 위험에 노출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는 주장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미국은 3만7천명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다. 미국으로서는 2천명 가지고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한국이 야속하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지금 우리와 미국사이엔 '냉철한 이성과 뜨거운 가슴' 모두가 요구되는 시기다. '몸 주고 뺨맞는 것'보다 어리석고 억울한 일은 없다.

양봉진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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