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만들기] 51. 남산의 훼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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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울의 모습은 남산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조선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으로 정한 한양에서 남산은 안산에 해당되는 산이다.

궁궐이나 주택 등 도성 안의 모든 건물이 남쪽을 향하던 조선시대에 남산은 모든 서울 주민이 일상에서 늘 쳐다보는 산이었다. 또 남산에 마련된 다섯개의 봉수는 나라 안팎의 변괴를 알리는 중요한 통신수단이었다.

조선왕조 5백년간 울창하고 푸르게 보호되던 남산이 훼손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하면서부터였다. 갑신정변의 선후약조로 1885년 남산 기슭의 녹천정 자리가 일본공사관 부지가 됐고, 녹천정 부근의 집터가 영사관 부지로 제공됐다. 또 이웃한 진고개(현재 예장동.주자동) 일대에서 충무로 1가에 이르는 지역이 일본인 거류구역으로 지정됐다. 이어 1918년부터 조선총독부는 남산 중턱 13만평의 땅에 조선신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또 신궁을 만들면서 참배도로라는 명목으로 예장동에서 서울역~후암동 쪽으로 너비 20m 정도의 도로도 개설했다.

한편 남산의 동쪽 봉우리 종남산 기슭은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어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조선 말 고종은 이곳에 장충단을 꾸미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때 순사한 이경식과 홍계훈을 비롯한 충신열사를 모시도록 했다. 그러나 일제는 19년 이곳을 장충단공원이라고 하고, 벚꽃 수천그루를 심는 등 완전히 모습을 바꾸었다. 29년에는 장충단 동쪽 소나무가 우거진 4만여평의 땅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위해 박문사란 명칭의 일본식 사찰까지 세웠다.

서울 도심의 반대편에 있는 남산의 남서쪽 기슭, 한강이 바라다 보이고 소나무가 울창했던 사면은 광복 후 외국에서 돌아온 동포와 북한에서 월남한 동포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크게 훼손되기 시작했다. 마을 이름도 '해방촌'이라고 불리웠다. 이 나라 최초의 판잣촌이 형성됐던 것이다.

이밖에 한국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환도가 이뤄진 뒤 일제시대의 경성신사 자리가 우여곡절 끝에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을 배후에 둔 기독교계열 학교인 숭의학원에 54년 인수됐다. 이후 숭의학원이 커짐에 따라 남산 계곡은 깎여서 운동장도 들어서고, 교사도 지어졌다. 서울시는 남산의 성격상 처음에는 가건축으로만 허가를 내줬으나, 불과 10여년 사이에 누구의 지시로도 허물수 없는 철옹성이 돼갔다.

남산의 동쪽 기슭, 장충단 주변 일본식 사찰이 흩어져 있던 이 지역은 광복 후 선점한 자들에게 연고권을 인정해 불하하는 과정에서 동국대가 사찰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해 확보했다. 처음 동국대 교사가 된 건물군은 모두 목조 기와건물 7동이었고, 부지 면적은 2만3천여평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환도한 동국대가 건물을 확장, 나감에 따라 남산의 동북쪽 기슭은 동국대 건물들로 완전히 점거됐다.

남산의 남쪽 기슭, 한남동에서 후암동을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길이 4㎞가 넘는 도로가 뚫린 것은 62~63년에 걸쳐서였다. 개통되던 당시 서울의 자동차가 1만여대에 불과할 때의 이 길은 지금의 이름인 소월길이란 이름에 맞는 도로였다. 그러나 제3한강교가 건설되고,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 이 길에는 자동차가 폭주하면서 남산의 생태계를 망가뜨리는 주요인의 하나가 되고 있다. 이밖에도 남산 어린이회관.국립극장.반공연맹.중앙공무원교육원 건립 등 공권력이 앞장선 사례에서부터 외인아파트.하얏트호텔 건설 등 민간에 의한 것까지 남산 훼손은 지속됐다. 1990년대에 들어선 이후 남산 제모습 찾기운동이 벌어졌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정리=신혜경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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