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막 뒤로한 채 제주 은둔 10년-왕년의 스타 김진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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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금은 영화계를 떠나 있지만 한평생 영화인의 긍지를 지니고 살아왔기 때문에 다시 영화계로 돌아갈 겁니다.
그동안 얼굴에 분칠해 번돈을 몽땅 영화제작에 쓸어 넣었다가 실패, 빈털터리가 됐지만 후회는 없어요.』
82년 제주에 내려와 제주시 외곽지대인 무수천 유원지 한적한 곳의 20평 짜리 단칸방에 살면서 부인 오경자씨(58)의 호텔건축사업을 도우며 여생을 보내고 있는 왕년의 스크린 스타 김진규씨 (68·제주시 해안동238)는 『제주도만큼 인심 좋고 아름다운 곳은 없다』며 섬생활을 만족해 하고 있다.
김씨는 배우협회회장을 다섯 차례나 역임하고 80년대 초반까지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맡는 등 영화계의 대부로 군림했으나 지난 70년 제작비 4억5천만원을 들여 자신이 제작·감독·주연을 맡았던 영화 『성웅 이순신』이 흥행에서 실패, 빚더미에 앉은 후 계속 불운이 겹쳐 좌절을 겪다 영화계를 떠나 제주에 정착했다.
노경희씨와 공연한 『피아골』에 주연으로 데뷔한 이후 1950년대부터 70년대초까지 20여년 동안 『벙어리 삼룡』 『성춘향』 『사랑방손님과 어머니』 『동심초』 『불러도 대답 없는 이름이여』 『이 생명 다하도록』 『청년 이승만』 『잉여인간』 『나 혼자만이』『오발탄』 『난중일기』 『성웅 이순신』 등 수없이 많은 작품을 남겨 영화계에 군림했었다.
김씨는 『성웅 이순신』 제작 당시 국내에서는 영화 한편 제작비가 4천만∼5천만원에 불과했으나 해전장면 등 특수촬영제작비로 엄청난 경비를 들여 기록적인 영화를 만들어 보려고 했었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22세때부터 연극배우생활을 시작한데 이어 연기생활 40여년 동안 9백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살아온 영화인의 일생에 아쉬움은 없었다고 다시 강조한다.
김씨가 제주에 정착하게된 것은 5·16직후 제주도개발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던 박정희 당시 최고회의의장의 부탁으로 인기연예인 김승호· 문정숙씨와 함께 위문공연차 제주에 처음으로 왔다가 따뜻한 인심과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노후를 제주에서 보내겠다고 결심, 뒤늦게 뜻을 이룬 것.
김씨는 당시 제주도민위문공연무대에서 『제주도는 삼다 (여자·바람·돌)에 정다를 더해 사다의 섬』이라고 인사해 열렬한 박수를 받았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부인 오씨와 함께 제주시해안동 무수천 유원지 중턱에 60실 규모의 가족관광호텔을 건축중인데 현재 공정90%로 올 여름 개관을 앞두고 있다.
김씨 부부가 처음 제주에 들어와 정착한 제주시 해안동 무수천 유원지 20평 짜리 단칸방에는 수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전화마저 가설할 수 없는 외딴곳이어서 일상생활에 불편이 많았다.
김씨는 요즘 매주 일요일부인과 함께 제주시 신 제주성당에 나가 교우들과 사귀며 제주도 사투리를 익히고 지금은 평통제주시협의회 자문위원직과 제주도수영연맹 이사직을 맡아 사회활동에도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3년전 88서울올림픽 때 그리스에서 채화된 성화가 제주에 도착했을때 김씨가 구간성화봉송에 참여하자 제주도민들은 처음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다가 뒤늦게 제주에 거주하고 있는 사실을 알 정도로 김씨는 조용히 지냈다.
최근에는 미국에서 음악공부를 하고 있는 장녀가 돌아와 10여일 동안 아버지와 지내다 돌아갔는데 모처럼 혈육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연기 생활하는 동안 친분관계가 두터웠던 장동휘씨와는 요즘에도 자주 시외전화로 지난 얘기를 나누고 있으며 상대역으로 호흡이 잘 맞았던 최은희씨가 귀국했을때는 너무 기뻐 성당에 나가 감사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조용한 무수천 계곡에서 새소리·냇물소리를 들으며 화려했던 옛일을 회상하는 시간이 금씨에게는 소중한 일과며 가끔 잊지 않고 걸어주는 친지들의 안부전화나 서신이 큰 즐거움이다.
78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난중일기』로 제작· 감독· 주연상을 휩쓸며 큰 영광을 안았을 때 김씨는 재기의 조짐을 보이는 듯 했으나 이 영화도 제작비를 많이 들인 것에 비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김씨는 이렇듯 한국영화계에서 영광과 좌절을 가장 많이 겪은 인물 가운데 한사람.
슬하에 5남매 중 김진·김진아씨가 영화배우로 대를 이어 활동하고 있지만 김씨는 『내가 영화계에서 어려운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자녀들이 연기자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고 했다.
김씨는 한국영화계에 대들보역할을 했던 김승호·최남현·주선태·박암 등 훌륭한 선배연기자들이 이미 타계하고 사신마저 영화계를 떠나 있어야하는 상황을 무척 안타까워하고 『씨받이』 등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 흥행위주로 예술성을 외면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실을 개탄했다.
배우들의 풍행에 대해서도 바람직하지 못한 점이 많다고 지적한 그는 춤 바람난 중동근로자 부인을 유혹해 금품을 뜯어낸 파렴치한 배우도 있었다면서 『연기인이기 이전에 인격을 갖추어야한다』고 말한다.
제작자나 감독도 최근 「벗기는 영화」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에 치중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고 꼬집고 이런 현상은 한국영화예술 발전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걱정했다.
김씨는 『어려운 제작환경에서도 50, 60년대 영화들이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자신의 전성기를 회고했다.
10여년 동안 제주에서 살면서 『척박한 땅을 일구고 거친 바다와 싸우며 삶을 이어 내려온 제주선인들의 강인한 생활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고 싶은 유혹을 강하게 느낀다』는 그는 동료영화인 신영균씨가 제주 남원지구에 영화박물관 건립계획을 세웠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매우 훌륭한 일이며, 영화계 지도자들이 적극 동참해주길 바랐다.
호텔건축공사가 끝나는 대로 상경할 준비를 하고있는 김씨는 『영화인이 해야할 일이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떠맡을 것이며 좌절직전에 구상해 두었던 영화 한편을 마지막 작품으로 남기고 싶은게 소원』이라고 했다. 【글 김형환 기자 사지 신상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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