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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급진-진보 돌다리 놓은 채광석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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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민식이 형이 세긴 센 모양이다. 꼭꼭 숨어 있는 운동가를 이렇게 끄집어내 오니 말야.」
「워낙 오지랖이 넓었지. 그게 형의 역할이었고.」
우리는 마주보고 웃음을 나눴다. 가슴 한구석으로 이름 붙이기 힘든 감정의 잔 파문이 일렁이며 지나갔다. 그렇다.
요즘처럼 우리 눈으로 세상을 읽기 힘들 때, 요즘처럼 무엇을 위해 싸워야할 지 막막할 때, 게다가 사분 오열 서로 갈라져 작은 힘조차 갉아먹을 때, 그의 존재란 얼마나 귀중하며 그의 죽음은 또 얼마나 비겁한가.』
최근 간행된 『실전문학』여름호에 실린 김남일 씨의 단편 『길』일부다. 한 문화운동가의 3주기를 맞아 선후배가 묘소를 찾아 우리사회에서 그의 존재를 재음미해보는 이 작품에서 「민식」은 바로 채광석이다.
오지랖이 워낙 넓어 선후배의 세대간 문학·미술·음악·무용·연극 등의 장르를 묶어 80년대 암울한 시절 문화가 민주화에 기여하도록 이끈 문화운동가 채광석.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39세로 짧은 삶을 마감했지만 채씨는 문화의 힘이 총보다 강함을 보여줬으며 문화는 여유 있는 삶의 고상한 장식품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우러난 정서로서 누구나 창작·향유할 수 있음을 온몸으로 보여준 시인·평론가이자 민중문학 운동가였다.
48년 충남서산에서 태어난 채씨는 68년 서울대 영어교육과에 입학하나 71년 10월 대학 내 위수령발동으로 강제입영 당한다. 휴전선이 바라보이는 최전선에서 31개월간의 군복무를 마친 채씨는 74년 가을학기에 복학했으나 1년을 못 채우고 75년 5월22일, 할복자살한 서울대 농대생 「김상진 열사 추모시위」주동자로 구속돼 공주교도소에서 2년6개월간 복역한다.
출소 후 80년, 짧았던 「서울의 봄」에 힘입어 복학됐으나 그해 5월 다시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돼 관악경찰서·서울 합수사·수방사·안양계엄사 등을 전전하며 고초를 당하다 8월18일 기소유예로 풀려난다. 채씨는 83년 학원자율화조치에 의해 복학을 허가 받았으나 끝내 포기, 문화운동권으로 뛰어든다. 『이 검은 장갑 덕분에 이런 곳에 다시는 안 올 놈이 몇 놈은 있을 테니까 두고 보자고』(시 「검은 장갑」 중).
그 「검은 장갑」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을까. 채씨는 문학을 위주로 한 문화운동의 일선에 선다.
84년 3월14일 민중문화운동협의회를 주도적으로 결성, 실행위원을 맡은 채씨는 또 자유실천 문인협의회를 재건,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문화를 「민주화를 위한 운동」으로서 엮어갔다.
80년 허망했던 민주화의 봄을 맛보다 빼앗긴 당시 문화인들은 그 좌절감과 정권의 시퍼런 서슬로 인해 뿔뿔이 골방으로 숨어들었다. 대신 노동자·농민 등 생산현장 혹은 기층 민중 세력들의 불만이 80년 중반 들면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비판적 기성 문화인·지식인들과 기층 민중들의 요구를 연결, 어떻게 거대한 민주화 흐름으로 끌어가느냐가 필요한 시점에서 채씨가 그 연결고리 역할을 한 것이다.
운동에 끼어 들지 않으려 자꾸자꾸 숨어드는 선배 시인·소설가들을 설득해 운동현장으로 끌어냈고, 그러한 선배의 온건한 태도에 못 마땅해 하며 급진적으로만 나가려는 후배들을 다독여 문화운동의 대중성을 확보하러 했다.
『별일도 아닌데 노인네 괜히 나오라 해서 왠 고생이냐.』 『행사가 너무 온건하게 끝나지 않았느냐』는 등 선후배의 불평을 잠재우기 위해 채씨는 거의 매일 새벽 두 서너 시까지 술추렴하며 그들을 다독거려야 했다.
『무슨무슨 활동을 벌이자하면 도저히 뺄래야 뺄 수가 없었다』는 채씨의 탁월한 조직능력에 힘입어 문화인들은 조직된 힘으로 구속문화인 석방운동 등 문화탄압에 대한 공동투쟁을 벌일 수 있었다.
85년 7월 20대의 젊은 화가들이 개최한 민중미술전시회 「1985년, 한국미술 20대의 힘」, 젊은 시인교사들이 교육현실을 비판한 무크 『민중교육』 등 80년대 중반 일련의 민중문화운동이 당국의 탄압을 받자 채씨는 자유실천문인협의회·민중문화운동협의회 실무자로서 즉각 성명을 발표, 당국의 부당함을 일반에 알리는가 하면 문화인들을 소집,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채씨의 문화운동은 당국에 눈에 가시처럼 느껴져 안기부·경찰서의 감시가 따라다녔으며 수시로 연행, 구금되곤 했다.
버스안내양·공장노동자들의 시·소설 등을 발굴, 「시인」 「소설가」등의 칭호를 주며 노동문학을 일궜던 채씨. 「문화운동의 감초」로 불리며 급진과 진보의 링커 역할을 하러 분주히 뛰오 다녔던 채씨는 1987년 7월12일 오전 3시께 마포 아현동에서 귀가 중 택시에 치여 숨졌다.
그날도 여성단체 연합주체의 민요한마당 공연을 보고 여느 때와 같이 선후배와 어울려 술을 마시며 앞으로의 운동방향을 논의하고 뒤늦게 자리를 뜨다 변을 당한 것이다.
7월14일 오전 신촌 세브란스병원 뒤뜰에서 민주통일 민중운동연합 주관으로 치러진 그의 영결식에는 문인·문화운동가·예술인·재야인사 등 1천여 명이 빼곡이 모여 고인을 추도했다.
그의 영안실에는 그해 6월 민주화운동의 결실로 연금상태에서 풀려난 김대중, 김영삼씨 등 거물급 정치인에서부터 막 수배가 해제된 운동가에 이르기까지 5천여 명이 조의를 표했으며 6·29선언을 발표한 노태우 당시 민정당대표위원도 조화를 보냈다.
『가자/이제는 메고 온 짐 스스로 짊어지고/매달리러 가자, 먼저 간 자가 비워두고/비워두고/비워두고 하늘로 떠났다는/비인 무덤에/가자,/사랑으로 고운 삼베에 싸여/사흘 잠자러 가자./사흘 잠자러 가자. (시 「사담민중사19-사랑」중)
87년 6·29선언을 부른 민주화운동의 한 주역이었던 채광석. 그는 오늘의 진통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급진과 보수로만 치닫는 요즘 세월이기에 시·평론으로, 또 문화운동으로 급진·진보를 여유 있게 싸안던 채씨의 넓은 오지랖의 빈자리가 그만큼 커 보인지도 모른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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