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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멀고 험한 개혁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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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역사가들은 89년 동유럽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을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로 꼽는데 이의를 달지 않는다.
1789년 프랑스대혁명으로부터 꼭 2백년만에 일어난 동 유럽혁명은 사회주의에 대한 동 유럽인들의 전면적이고도 확실한 거부인 동시에 사회에 의한 국가권력의 흡수라는 고전적 형태의 혁명이었다.
동유럽은 이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전후 45년 동안 존재해온 동유럽 사회주의 블록은 그 수명을 다했다. 바르샤바조약기구는 해체를 눈앞에 두고 있으며 코메콘(동유럽경제상호원조회의)도 이미 기능을 상실했다.
동 유럽인들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거부는 90년 한해 동안 실시된 사상 최초의 자유 총선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났다. 각국 공산당은 하나같이 선거에서 참패, 권력을 상실했다. 가까스로 재집권에 성공한 나라는 그 후 계속되는 권력의 정통성시비로 정치불안에 싸여있다.
하지만 공산정권의 몰락이 바로 민주국가로의 전환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숱한 문제들을 야기했다. 공산체제의 갑작스런 몰락은 정치·경제·사회 모든 부문에서 메우기 힘든 공백들을 남겼다.
구체제는 몰락했으나 그 잔재는 살아남아 새로운 사회체제로의 전환을 방해하고 사회체제의 미 정립에시 비롯된 과도기적 대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동유럽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며 참다운 혁명은 지금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동유럽에서 추진되고 있는 개혁은 크게 두 가지로 나올 수 있다. 정치적으로 민주적 다원주의 확립, 경제적으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민주적 다원주의는 다당제에 입각한 의회정치, 정당설립 및 정치활동의 자유, 언론자유의 보장 등으로 요약된다.
동유럽 각국엔 지금 각양각색의 정당이 우후죽순처럼 출현하고 있다. 어떤 단일정당도 의회 내 안정 다수의석을 확보하지 못하고 각 당 연립정부형태를 취함으로써 언제든 붕괴될 수 있는 취약성음 안고 있다.
언론 또한 별다른 준비 없이 거의 무제한에 가까운 자유를 받아들임으로써 무책임한 보도, 선정수의, 섹스물의 범람 속에서 경영상 이유로 신문·잡지의 창간과 폐간이 일상사가 되고 있다.

<민주세력 분열우려>
정치불안은 곧바로 사회불안으로 연결된다. 현재 동 유럽인들은 극도의 경제난 속에서 정치·사회적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다.
89년 민주화혁명 당시의 성취감은 현실의 냉혹함에 밀려 점차 사라져가고 있으며 혼란을 극복해줄 강력한 통치의 요구가 세력을 얻고 있다.
이와 관련, 우려되는 것은 민주세력의 분열이다. 공산독재 하에서 반공·반 독재를 명분으로 한 우산아래 뭉쳤던 이들은 이제 각자 갈 길을 가고있다.
동유럽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폴란드 자유노조 연대는 양분, 체코의 시민포럼은 삼분됐다.
경제개혁은 정치개혁 보다 훨씬 고통스럽다. 소련으로부터 스탈린식 사회주의경제를 도입했던 동유럽국가들은 이제 모두 서방식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돌아가고 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본 적 없는 이 같은 대 실험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또 감수해야할 고통과 부작용도 엄청나다. 하지만 대다수 동 유럽인들은 이 길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데 의견이 일치한다. 다만 방법·속도, 그리고 누가 더 많은 희생을 치르느냐에 대해 이견이 있을 뿐이다.
미국 인권단체 프리덤 하우스의 지난 4월 동유럽 3국 국민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85%이상이 민주화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더 고통받고 있다고 응답했으나 사회주의경제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은 단 4%인 것으로 나타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헝가리의 뒤를 따르고 있는 나라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 이들 국가는 지난해 l월, 그리고 금년 l월부터 각각 야심적인 시장경제개혁에 착수했으며 그 과감성과 급진성에 있어 헝가리의 그것을 능가하고 있다.
루마니아·불가리아 등은 아직 정치적 문제로 본격 개혁에 착수하지 못한 상태며, 유고슬라비아는 민족문제라는 난제가 경제개혁의 발목을 잡고 있다.

<실업증가 가장 심각>
경제개혁 결과 당초 예상대로 인플레 진정에 따른 통화안정·수출증가·사기업 발전 등 긍정적 측면이 나타나고 있으나 다른 한편으론 엄청난 부작용이 따르고 있다.
적자기업 도산에 따른 실업, 가격자유화 및 정부보조금 삭감으로 인한 물가폭등과 생활수준하락, 원자재 구득난으로 인한 공업생산 저하, 경기후퇴, 빈부격차 확대 등은 국민들의 인내 한계를 넘고 있다.
이중 가장 심각한 깃이 실업이다. 오는 연말까지 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의 실업자수는 각각 2백만·50만·30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동 유럽국가들의 경제개혁이 고전하는 또 다른 이유는 코메콘의 붕괴와 통독에 따른 구 동독 시장의 상실, 그리고 걸프전이라는 돌발사태로 인한 피해 때문이다.
지난 l월l일부터 소련이 동유럽국가들에 에너지 및 원자재를 국제가격에 따라 경화로 지불할 것을 요구해옴에 따라 에너지·자원 구입 비용이 급증했으며 소련경제의 파탄으로 소련 소비자들이 구매력을 상실, 대소 수출이 크게 줄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걸프전에서 유엔이 대 이라크 경제조치를 취함으로써 대 중동수출이 막혔을 뿐 아니라 기왕의 수출대금으로 받기로 했던 원유가 완전 공급 중단됨으로써 더욱 큰 피해를 보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 같은 대외여건 변화로 약 50억 달러의 손실을 보았으며 불가리아는 걸프전 피해만도 l4억 달러에 달한다.
경제적 고통은 곧바로 정치불안으로 연결된다. 폴란드 자유노조는 이달 초 바웬사 대통령 취임 후 처음으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한부 파업을 벌이는 한편 경세개혁 입안자인 밸체로비치 재무장관의 해임을 요구했다.
바웬사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동맹은 오는 10월로 예정된 자유 총선에서 패배를 우려, 경제개혁 정책의 수정을 요구하고 있으나 바웬사 대통령은 불가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바웬사 대통령은 필요할 경우 대통령령으로 경제개혁을 추진하고 선거법 개정문제로 의회와 대립, 의회해산도 불사하겠다는 독재자적 면모를 보이고 있다.
사회주의 폐쇄사회에서 개방사회로 전환함에 있어 필연적 부산물로 각종 범죄 등 사회비리현상을 빠뜨릴 수 없다.
현재 동유럽 각국에선 절도·강도·살인·마약·매춘 등이 크게 증가, 사회불안이 높아가고 있다. 과거 「완전한 치안」을 자랑하던 이들 나라에서 이제 밤거리를 혼자 나서는 것은 금기가 되고 있다. 또한 경찰은 사기저하·장비부족으로 고전하고 있다.
폴란드는 유럽 최대의 암페타민(각성제의 일종)생산국이 됐으며,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는 「유럽의 방콕」이란 불명예가 붙었고, 체코 수도 프라하엔 소련과 동유럽 각지에서 몰려온 3만여 명의 「밤의 여인」들이 활약중이다.
자본주의의 열풍은 동유럽 전 지역을 휩쓸고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돈벌기가 평등주의라는 과거의 유습에 젖어있는 동 유럽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고있다.
한쪽에선 벼락부자가 태어나고 한 쪽에선 쓰레기통을 뒤져야하는 빈부격차가 생겨나며 공산당시절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한 당 간부·고급관리들이 「붉은 자본가」로 탈바꿈하는 등 계속 특권을 누리고 있다.
국가간·민족간 갈등도 심각하다. 과거 동유럽이 견고한 블록을 유지할 때 소위 사회주의 국제주의라는 계급적 연대성으로 극복했던 것으로 인식됐던 민족문제라는 해묵은 숙제가 다시 고개를 든 깃이다.

<안보문제도 큰 숙제>
안보상황 또한 불안이 계속되고 있다. 체코·헝가리에서 소련군이 완전 철수했으며 폴란드·구 동독주둔 소련군도 94년 완전철수를 목표로 병력감축이 진행중이다.
문제는 소련군이 떠난 뒤 생겨난 안보상 공백을 어떻게 메우느냐 하는 것이다. 동 유럽국가들이 현재 가장 관심을 두는 것은 소련내부의 정치변화다.
만약 보수파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공화국간 내란이 발생했을 경우 우선 영향을 받는 쪽이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내란이 일어났을 경우 소련으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난민들이 몰려올 것은 분명하며 대 파국이 올 것이 명약관화하다.
이 때문에 동 유럽국가들은 국가간 자체결속을 위한 지역 협력체제 구축을 시도하는 한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등 서방측 집단 안보 체체에 협조를 구하고 있으나 만족스런 반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유럽에는 지금 서로 다른 두 가지 경향이 동시에 나다나고 있다. 하나는 국가간 통합·상호의존 강화와 민주주의·인권 등 인류의 보편가치를 공유하려는 경향이다. 다른 하나는 민족주의의 강화·개별화·특수화 경향이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우세한가에 따라 앞으로 유럽정세가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행하게도 동유럽의 경우는 후자에 속한다.
지금 동유럽은 기로에 서 있다. 동유럽은 과연 상식·시장경제·법치주의·도덕적 가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계속되는 정치, 경제적 혼돈, 새로운 형태의 독재체제로 갈 것인가.
동유럽은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가. l4회의 현지취재 시리즈를 싣는다. <글 정우량 특파원·사진 신동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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