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인종차별 종식/의회서 주민등록법 폐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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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의 지위향상에 도움안돼”/민족회의
【요하네스버그 AP·로이터=연합】 남아프리카공화국 의회는 17일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 정책에 관한 마지막 근거법인 주민등록법을 압도적 다수의 표결로 폐지시킴으로써 40여년간에 걸친 인종차별 제도를 종식시켰다.
백인과 아시아계 및 혼합인종계의 인종별 3원제로 이루어져 흑인이 배제돼 있는 케이프타운의 남아공 의회는 이날 3백8명의 의원중 우익계 백인 보수당의 38명만이 반대한 가운데 남아공의 모든 주민을 백인·흑인·아시아인·혼합인종의 4개 범주로 분류하는 1950년의 주민등록법을 압도적 다수로 폐지키로 가결했다.
주민등록법은 모든 남아프리카 주민들이 출생시에 그들의 피부색에 따라 등록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는 모든 아파르트헤이트 조치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모든 국민은 이 분류에 따라 그들이 거주할 지역,다닐 학교,사용할 공중화장실과 묻힐 묘지가 결정된다.
프레데릭 데 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은 의회의 합동회의에서 이제 아파르트헤이트는 역사의 유물이 됐으며 『모든 사람이 여기에서 해방된다』고 선언했다.
그는 금년내에 모든 인종간의 협상이 시작되도록 정부가 최선을 다할 것이며 인종차별이 배제된 새헌법이 2,3년내에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흑인단체인 아프리카민족회의(ANC)는 이미 인종분류가 된 사람들은 새로운 비인종차별 헌법이 채택될 때까지 그 분류에 따라야 한다는 점을 지적,『설사 잠정적일지라도 인종분류가 남아 있다는 것은 수락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단체는 이어 이 법의 폐지는 다분히 상징적인 것이며 흑인 대다수의 지위향상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치는 아파르트헤이트의 폐지에 있어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아공에서 가장 중요하고 어려운 인종문제 개혁조치는 주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3천만명의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게될 새 헌법을 채택하는 것으로써 앞으로 이에 관한 협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새 헌법 제정때까지는 “산넘어 산”/흑인들끼리 주도권 다툼도 골치(해설)
17일 남아공의회가 「주민등록법폐지단」을 가결함으로써 적어도 공식적인 인종차별의 근거는 사라지게 됐다.
지금까지 이 법은 출생신고때부터 백인·인도인·혼혈인·흑인으로 구분,거주지·학교·공중변소의 사용뿐만 아니라 사후의 묘지조차 미리 정해놓아 이른바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종차별정책을 집행하는 꼬리표 구실을 해왔다.
그러나 이번 조치에도 불구하고 이나라 국민 모두에게 동등한 시민권이 보장되는 실질적인 민주개혁의 길은 넘어야 할 산들을 첩첩이 남겨놓고 있다.
3천만명의 흑인이 배제된 가운데 백인의 절대우위를 보장한 3원제 의회에 흑인이 참여하고 대통령선거 등 국가주요 사안에 온국민의 동등한 투표권을 보장하기위해서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이 필요하다.
드클레르크 남아공 대통령이 조만간 이문제 협상을 위해 흑백협상을 제안할 것이지만 아프라카민족회의(ANC)등 흑인단체들은 선결조건을 내세워 참여를 거부하고 있다.
ANC는 정치범의 완전석방,수천명이 희생되고 있는 흑인간 폭력중단을 위한 정부의 납득할만한 조치없이는 정부의 개혁의지를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백인의회의 야당인 보수당은 「주민등록법폐지」 자체가 『대통령이 백인임을 부끄러워한 처사』라며 백인우월정책을 고집하는데다가 집권국민당의 피에프 마라이스 대변인조차 인종차별 철폐는 『소유의 평등이 아니라 소유기회의 평등일뿐』이라며 흑인들의 토지등 피해보상에는 응하지 않을 기세다.
또 법률상으로는 흑인들이 비교적 시설이 좋은 백인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됐지만 각학교는 학부형 72%이상이 찬성해야 흑인학생을 받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등 백인들의 흑인차별의 틈은 곳곳에 널려있다.
게다가 흑인들간에 인종차별 철폐이후의 정치주도권을 둘러싼 폭력이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실질적인 평등화 개혁에 눈돌릴 겨를이 없는 지경이다.
법률상의 인종차별 철폐가 흑인민중들의 실생활개선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 같다.<이기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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