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돈돈 풍요 속 빈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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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시중에 돈이 없다고들 야단법석이다. 특히 기업들은 자금난을 너나없이 호소하고있다. 「돈 가뭄」에 대한 하소연은 대기업·중기업·소기업을 가릴 것 없이 한 목소리로 터져 나오고 있다.
장사하는 사람들 치고 자금사정이 여유 있다고 말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두고 없는 법이지만 상황이 급박하긴 한 모양이다.
내로라하는 재벌그룹들마저 돈이 달려 하루짜리 급전인 타입화를 그날그날 돌려가며 겨우 부도를 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비록 일부 계층이지만 가계쪽은 그래도 여유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있다.
지난 15∼17일 경기도 고양군 성사지구에서 접수된 1천4백64가구분의 아파트분양에 무려 8만여명이 몰려들었고 일거에 모인 돈이 5천5백여억원에 달했던 점이 그것이다.
금융당국은 그들대로 볼멘소리를 하고 있다. 돈의 수위를 대략적으로 알아보기 위해 잣대로 삼고있는 총통화(M2)의 증가율이 5월 들어 목표치(17∼19%)를 넘어섰다고 걱정이 태산이다.
5월 중 총통화증가율은 거의 20%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이 때문에 한국은행은 시중은행들에 월말까지 일체 돈을 내주지 말라는 「지시」까지 내려놓고 있다.
한쪽에서는 돈이 너무 많이 풀렸다고 야단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돈이 없어 부도가 날 지경이라고 법석이다.
다른 통화지표를 제외하고라도 총통화만 70조여원에 달하고 있는 판에 그 많은 돈들이 도대체 어디에 가 있길래 이처럼 다른 주장들을 하고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은행금고·회사금고·개인 금고와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이 같은 「우문」에 대해서는 내로라하는 한은의 전문가들조차 똑같은 의문제기와 함께 비슷한 대답을 하고 있다. 우문현답인 셈이다.
그러나 속사정을 자세히 뜯어보면 돈이 생산적인 곳에 있지 않고 소비지향적이고 투기적인 곳에 쏠려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돈이라는 것은 물 흐르는 방향과는 거꾸로 흐르게 돼있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지만 돈은 높은데로, 다시 말해 수익이 높은 곳을 향해 흘러가게 돼있는 것이다.
예컨대 연말 주가가 뛰고 장이 좋을 때는 주식시장으로 뭉칫돈들이 몰려들지만 요즘처럼 주식시장이 침체돼 주가가 연중 최저치를 기록할 때는 다른 곳으로 돈이 옮겨 앉게 되는 것이나.
한때 죽을 쑤던 채권시장이 최근 활기를 띠고 있는 것이 바로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점을 반영해 올 들어 4월까지 채권거래액은 27조5천63억원에 달했다. 반면 주식거래는 같은 기간 중 15조3천억원에 불과했다.
채권하면 으레 거금의 기금을 갖고있는 기관투자가들이나 금융기관이 사고 파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올 들어서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작년 말까지만 해도 10·8%대에 머물러있던 개인투자자들의 채권거래비중이 4월말 현재로는 18·5%까지 커진 것이다. 주식투자에 재미를 못 본 개인들이 채권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장이 좋았던 지난 89년3월 무려 2조8천억원에 달했던 주식시장의 고객예탁금이 지난 28일 1조원 아래(9천8백63억원)로 떨어진 점이 바로 이 같은 돈 흐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사정이 이러다보니 기업들이 자금난을 호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셈이다. 상장기업의 경우 유상증자를 통해 비공개 기업의 경우 공개를 통해 필요한 자금을 직접 조달해 써야 돈 끌어쓰는데 드는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데 주식시장이 침체돼 그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채권시장의 사정이 좋다고는 하나 거래물량의 7대3 정도로 국·공채가 회사채를 압도하고 있어 돈 가뭄 해소에는 역부족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반면 투기적 요소가 다분한 주택금융쪽에는 많은 돈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올해 분당·일산 등 수도권5개 신도시에서 분양예정인 8만7천3백여가구분의 주택에만 약3조원 정도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고 있는데 청약접수 때마다 너도 나도 몰려들어 매번 엄청난 경쟁률을 기록하는 것으로 미루어 주택대기성 자금이 상당한 규모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전문」부동산투자용 자금도 그 규모가 대단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건설경기의 과열에 따른 경제전반의 반점을 우려해 정부가 신축허가를 계속 내주지 않고 있지만 대규모의 빌딩을 짓겠다고 허가신청을 내놓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볼 때 돈이 비교적 넉넉히 풀려있다는 금융당국의 견해는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돈들의 소재와 용처가 비생산적인 곳에 많이 몰려있는 점이 자금사정을 빡빡하게 느끼게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당장 시설·운전자금이 필요한 기업들로서는 급한 불을 끄기 위해 금리를 개의치 않고 닥치는 대로 돈을 끌어쓰게 돼있다.
더욱이 기업들의 급전조달창구였던 단자사들 중 큰 덩치였던 8개 투신사가 은행이나 증권사로 전업하게 돼있어 이들 또한 영업자금 확보를 위해 대출금을 적극적으로 거둬들이고 있어 사정을 한층 어렵게 만들고있다.
이런 시중의 자금난을 반영해주는 것이 서울 명동을 중심으로 한 사채시장의 동향이다. 사채업자들이 최근 들어 고리대금업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고있다는 것이다.
은행돈·단자돈을 구경하기 힘든 상황에 월3%(연36%)짜리 고리채라도 얻어 써야 하는 상황이 벌어져 사채업자들이 활개를 치고있고 특히 중소기업들은 많은 업체가 사채로 연명해가고 있는 것으로 기협중앙회의 조사결과 나타나고 있다.
자금사정이 6월 들어서도 풀리지 않으리라는 우려와 함께 그 같은 조건이 가시화되면서 돈을 미리 확보해두자는 가수요까지 겹쳐 금리는 계속 오름세를 타고있다.
악순환의 연속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업들이 주장하는 대로 은행창구를 활짝 열어놓을 수는 없다는게 금융당국의 입장이다. 물가불안요인이 상존해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들이 사업계획을 호소하는 감량경영의 자구책을 강구해야 지속되는 「돈 가뭄」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전문가들의 지적을 경청해야할 때다. <이춘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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