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법과 절차마저 무시되면…/신성순(중앙칼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금 백병원과 명동성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장집행 거부사태를 지켜보면서 당혹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듯 하다.
물론 과거에도 실정법이 정면에서 도전받고 정부의 권위가 무시된 예는 얼마든지 있다. 특히 이념을 달리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당연히 예상되는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지금 백병원이나 명동성당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그와 같은 선상에 놓고 보자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서 여러날째 농성하고 있는 재야인사나 학생들은 우리 사회가 좀더 민주적으로 개혁되기를 바라고 이점에서 일반 국민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그런 그들이 적법절차에 의해 법원이 발부한 영장의 집행을 거부하고 나서고 있고 정부가 속수무책으로 이들을 지켜보고만 있다는 점이다.
이런 사태를 놓고 어떤 이는 서울 한복판에 대한민국 법률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지대가 생겼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이곳을 해방구라고까지 부르기도 한다.
일의 잘잘못을 제쳐두고라도 국회가 정한 법률과 이를 집행할 책임있는 정부가 엄연히 있는 나라에서 법률에 의해 법원이 발부한 영장이 물리적인 힘에 의해 집행이 저지당하고 있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해괴한 일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매사를 법의 논리대로만 따질 일은 아닐지 모른다.
정부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한 일이 많고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샀으면 죽은 학생의 사인규명이나 필적의 진위를 가리는 일조차 정부손에 맡기지 못하겠다고 버티겠는가고 묻는다면 정부측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60년 4·19와 87년 6·10사태 등에서 겪었듯이 나라의 민주화를 학생들의 용기와 희생에 의지했던 과거를 돌이켜 볼때 각목을 들고 병원이나 성당을 지키는 학생들에게 큰 소리칠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의심스럽다.
따지고 보면 지금 명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바로 그같은 과거의 일들을 배경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시민들이 입을 다문채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같은 지난날의 약점 때문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이 어떻게 돌아가든 구경만 하고 있어도 좋다는 얘기는 될 수 없다. 재야나 일부학생들이 옳다고 믿고 하는 일이 진정 온국민이 최상의 가치로 내세우는 민주화 작업이라면 더욱 그렇다.
과거는 과거고 지금은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힘을 모아 구축해 나가야할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 중에는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일들이 적지않다. 보는 사람들이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중의 하나가 왜 김귀정양 사인을 해명하는 열쇠가 될 부검을 거부하느냐는 점이다. 잘잘못은 원인이 분명히 가려져야 판명될 수 있는 것이고 잘못에 대한 추궁은 그후에 해도 늦지 않다.
물론 정부에 대해 선사과를 요구하는 것도 일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숨진 김양이 가담했던 시위가 비록 불법이었다 하더라도 경찰의 시위진압 과정에서 예기치 않았던 사고가 발생,귀중한 젊은 생명이 희생당했다면 정부로서 사과하는 것이 옳다. 그것은 김양의 사망에 대한 직접적인 책임유무를 떠나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해야할 경찰이 결과적으로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데 대한 자기반성의 자세이기도 하다.
감정이 날카롭게 대립된 상황에서 그것이 경찰의 위신이나 공신력을 떨어뜨리고 책잡히는 일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그것은 잘못 생각이다. 젊은 생명을 희생당한 가족이나 그 동료들 앞에 정부는 좀더 겸허한 자세를 보일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부가 사과하지 않겠다 해서 사실의 규명과 법의 집행까지 거부하는 것도 민주시민으로서 평가받을 자세는 못된다고 여겨진다. 더욱이 대책위 책임자가 김양의 장례를 노정권퇴진과 연계시키겠다는 발언을 했다니 투표로 대통령을 뽑은 국민들을 어떻게 보고 하는 말인지 궁급하다. 민주주의는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해 두고싶다.
또 하나 납득할 수 없는 것은 제도권 정당인까지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당인은 현행 헌정질서를 전제로 있는 것인데 이런 사람이 법집행 거부에 앞장서고 있다는 것은 해명이 필요한 일이라 여겨진다.
강기훈씨의 필적감정문제도 자신이 있다면 왜 당당히 나서서 진위를 가리지 못하는지 묻고싶다. 정부를 못믿겠다는 말에는 과거의 정부 작태로 보아 수긍이 안가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온세상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문제다.
정부가 설사 다른생각이 있어도 그게 가능한 상황이 아니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영장의 집행을 물리적 힘으로 거부한 일이다. 재야나 학생뿐만 아니라 온국민이 추구하는 민주화란 국민이 스스로 법을 만들고 그것을 지키는데서 비롯된다. 더욱이 영장제도는 그 근원이 바로 국민의 권리보호에서 비롯된 것이다.
믿을 수 없다고 법률이 정한 규범과 절차를 모두 무시해 버린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띨 것이며 그때의 혼란과 그로 인한 국민들의 고통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