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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여기 이사람] 노원우체국 집배원 박완식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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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편지 왔습니다, 편지요."

서울에서 몇 곳 남지 않은 '달동네'중 하나인 노원구 상계 1동 노원마을. 4~5평짜리 무허가 주택 1천2백여채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골목 사이로 노원우체국 집배원 박완식(42)씨의 목소리가 청아하게 울려퍼진다. 그 소리에 홀로 단칸방에 누워있던 박연애(70)할머니가 쪽문을 열며 반겼다.

"어이구, 어서 와. 오늘은 평소보다 좀 이르네."

朴씨는 전할 우편물이 없더라도 13, 15세 손자들과 어렵게 생계를 꾸려가는 朴할머니의 집을 매일 방문한다. 이날은 구치소에 있는 할머니의 아들이 오랜만에 보내온 편지를 전하려고 서둘러 왔다. 글을 못 읽는 할머니를 위해 한줄 한줄 편지를 읽어준 朴씨는 주머니에서 약봉지를 슬그머니 꺼내놓고 단칸방을 나섰다. 어제 들렀을 때 허리가 아파 하루 종일 누워 있다던 얘기가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朴씨는 자신을 '행복한 집배원'이라고 소개한다. "소외된 이웃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이다. e-메일이 널리 퍼진 뒤 대도시의 집배원은 각종 청구서.고지서나 전해주는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바뀐 지 오래다. 하지만 朴씨는 자신의 담당구역인 노원구 일대에서 주민들과 11년째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

"처음 이곳을 담당하게 되었을 때는 길도 잃어버리고 장독도 많이 깼지요. 사람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만큼 좁은 길과 번지 표시도 없는 무허가 건물들 사이에서 헤매야 했으니까요. 이제는 편지봉투에 이름 석자만 적혀 있어도 배달을 합니다."

빙그레 웃어 보인 朴씨는 2천3백여통의 우편물로 가득 찬 15kg이 넘는 가방을 다시 오토바이에 싣고 중계본동 104번지로 향했다.

역시 가파른 오르막에 위치한 저소득 주민 밀집 지역이다. 朴씨의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자 녹슨 철제 대문 사이로 주민들이 하나 둘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재빨리 우편물 배달을 마친 朴씨가 찾은 곳은 여덟살난 손자와 둘이 사는 윤필순(61)할머니의 집. 朴씨는 尹할머니 가족을 비롯, 이 동네 소년.소녀가장 7명에게 매달 5만원씩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 尹할머니는 "요즘 몸이 불편해 청소 노역도 쉬고 있는데 매번 필요한 물품을 사다주고 생활비도 도와준다"며 "노인들의 말동무도 돼주는 자식 같은 사람"이라고 朴씨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 지역에서 박씨의 도움을 받아보지 않은 주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그는 이웃돕기에 열심이다. 매년 여름이면 동네 불우 노인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열고 있다. 8년 전 집에서 기르던 토종닭 12마리를 잡아 대접한 것이 시작이 됐다. 올해는 지난 8월 15일 자비 2백60만원을 들여 노인 2백80명에게 닭죽을 대접했다. 시각 장애인의 외출돕기와 독거노인 목욕수발도 그가 자청한 몫이다.

朴씨는 전남 보성에서 8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세살 위 큰 형이 몇 년간 계약직으로 집배원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며 빨간 모자와 자전거를 선망하게 됐다. 서울로 올라와 꿈을 이룬 朴씨의 뒤를 이어 동생 종식(33)씨도 6년 전부터 서울 중앙우체국에서 근무하고 있다.

2001년부터 형을 도와 이웃돕기에 함께 나선 종식씨는 "처음에는 업무도 어렵고 살림도 넉넉지 않은 형이 자기 시간을 쪼개가며 봉사하는 것이 답답했었다"며 "이제는 집배원이야말로 봉사를 실천하기에 가장 좋은 직업이라는 형의 말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朴씨는 "11년 집배원 생활로 모은 재산은 6년된 오토바이와 3천만원 전셋집이 전부지만 정년 때까지 우편 배달과 이웃 돕기를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은진 기자<nadie@joongang.co.kr>
사진=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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