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한강교 조기폭파의 책임자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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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한강에 처음으로 세워진 한강인도교 (지금의 한강대교)는 지금까지 2차례에 걸쳐 다리가 무너지는 비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중 하나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6월 28일 우리 국군의 손으로 폭파된 것이다.

국군은 북한군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한 군사전략상의 이유를 내세우며 수많은 민간인들을 퇴로가 막힌 적의 치하에 남겨둔채 한강인도교를 조기폭파한다. 당시 서울은 창동저지선이 붕괴되고 미아리 전선마저 허물어지며 공산군이 시내로 들어오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공병감. 탱크가 시내에 들어왔다. 즉시 한강교를 폭파하라" 육참총장 채범덕은 최창식 공병감을 전화로 불러 다급한 목소리로 다리폭파를 지시했다. 이때가 새벽 02시쯤. 그리고 약 30분뒤 '꽝!'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한강다리는 두동강 났고 그 순간 다리를 건너고 있던 8백여 시민과 장병들은 폭음속에 묻혀 목숨을 잃었다.

피난길을 잃은 1백50만시민과 철수로를 차단당한 4만여장병들의 엄청난 희생과 시련, 막대한 군장비 손실. 한강교 조기폭파의 여파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폭파도화선에 서둘러 불을 댕긴 것은 후방교란을 목적으로 한 불과 2대의 인민군 탱크가 원인이었다.

이 어처구니 없는 결정의 모든 책임은 공병감 최창식 대령에게 돌아갔다. 부산에서 열린 군법회의에서 그에 대한 유죄가 선고되었고 1950년 9월 10일 총살형에 처해진다. 민족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비난을 떠안은채 총알세례를 받았던 그는 그러나 14년 뒤인 1964년 오늘 (11월 14일) 가족들이 재심청구로 무죄를 선고받고 사후복권되었다.

한편 당시 한강교 폭파는 육참총장 채병덕 - 참모부장 김백일 - 공병감 최창식 - 공병학교장 엄홍섭 선에서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여러 증언과 정황진술이 엇갈려 지금까지도 풀리지 과제로 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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