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담한 결과에 말문이 막혀…|지바 세계탁구서 부진 유남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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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북한의 형제들과 같이 단일 팀을 만들어 출전한 제41회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끝난지도 2주일이 돼가건만 그동안 꿈속에서 생활을 한 것 같다.
7천만동포가 지켜보는 국제대회에서 금메달은커녕 단 한개의 동메달도 따내지 못하다니….
우승이 유력시되던 현정화와의 혼합복식8강 전에서 허무하게 무너진데 이어 마지막 남은 단식준준결승에서도 중국의 마원거에게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패해 입상도 못한 것이다. 나는 이날(5일)밤 숙소에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12년전 늘 어리광을 받아주시던 할머니가 돌아가셨을때 이후 처음이었다.
「안방챔피언」「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돈으로 매몰된 스타의식」 등 88년 서울올림픽 단식제패이후의 부진을 꼬집는 갖가지 빈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본 한달 합훈동안 정말 입안이 헐고 빈혈이 일 정도로 노력했는데 결과는 매우. 참담했다.
탁구를 시작한 국민학교 4학년(78년)이래 국내외대회를 막론하고 입상조차 못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귀국환영행사가 벌어진 지난 9일, 공항에서 마주치는 팬들마다 『고생했다』며 말을 건네건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13년의 내 탁구인생이 여기서 끝나고 마는 것인가.
근2주 동안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한 까닭에 눈은 퀭하고 체중(평소63㎏) 또한 60㎏을 밑돌게됐지만 정신만은 맑아지는 느낌이다.
나의 패인은 무엇일까, 재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주위에선 침체이유를 체력 열세, 돈에 물든 정신력 결여, 지나친 스타의식 등으로 꼽는다.
대회참가 성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야하는 선수신분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은 애정어린 충고로 굳이 변명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러한 원인 못지 않게 이번 세계선수권대회를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나는 알면서도 적은 몰랐다는 것이다.
단식예선 3회전에서 맞붙게된 노르웨이의 왕얀셍에게 최근 일본 올스타 서키트에서 나와 대전한 적이 있는 세계랭킹3위인 폴란드의 그루바가 나의 장·단점을 알려주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세계랭킹1위인 스웨덴의 발드너 또한 나에 대한 정보를 모든 유럽선수들과 교환하는 것을 현지에 가서 알 수 있었다.
88년 올림픽 때까지 나 또한 유명선수들의 장·단점을 면밀히 파악, 노트에 정리하고 세트마다의 작전계획까지 수립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경기에 임했었다.
이번 대회에서 언젠가 모르게 사라진 이런 노력의 자세를 새삼 깨달은 것이다.
지난주 탁구를 그만둘까하는 심한 절망감속에 부산 집을 찾았다가 몸살로 앓고 계시는 어머니를 뵙고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생겼다. 결코 못난 모습으로 끝마무리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다.
먼저 김택수에게조차 빼앗긴 「안방」자리를 되찾고 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제패에 l3년의 내 탁구인생을 걸 계획이다.
요즘은 내가 가장 아끼는 재산목록1호인 승용차 「소나타」의 처분까지 고려하고 있다.
훈련후의 드라이브는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청량제였지만 호화치장·음주운전 등으로 얼룩지는 정신만큼은 바로잡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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