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대책회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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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명지대생 강경대군 치사사건을 계기로 결성된「폭력살인규탄과 공안통치공식을 위한 범국민 대책회의」가 지난달 29일과 지난 4일·9일·11일로 이어지는「징검다리시위」를 주도해 정국에「태풍의 눈」으로 등장하면서 대책회의를 구성하는 재야단체들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책회의는 강군사건 이후 국민연합과 전민련(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을 중심으로 전대협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교조(전국교직원노조)·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등 소위「5전재야」는 물론 학계·종교계·법조계·의료계와 환경단체들까지 총망라해 55개 단체로 구성된 6공 최대의 운동구심체다.
우리사회 중요한 변혁의 길목마다에서 제도정치권을 제치고 실질적인 힘을 행사하고 있는 재야단체의 실체와 계보, 그리고 위상은 어떠한가.
「재야」가 어떤 단체나 인사를 가리키는 명칭인가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준이 없다.
하지만 재야는 정권에 도전하는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던 유신통치의 산물이라는 데에는 의견이 일치한다.
박정희 정권은 자신에게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제도정치 밖으로 몰아냈고 밀려난 야당정치인과 해직교수·문인·종교인·언론인·학생 등 반정부인사들은 개인적인 안면과 친분관계를 통해 이합 집산을 거듭했고 이들에 대해 막연히 붙여진 명칭이 바로 재야세력이었다.
70년대 재야단체들은 71년「민주수호국민협의회」, 74년「민주회복국민회의」, 76년「민주헌정동지회」, 78년「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등으로 명맥을 이으며 유신정권의 폭압에 항거, 1백만 서명운동을 펴는 등 나름대로의 역할을 해왔다.
80년 이후 5공이 들어서고 정치규제를 통한 강압통치가 계속될 때 민통련·민추협 등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의 모임은 들러리로 전락한 야당대신 그나마 유일한 반대세력으로 명맥을 유지해온 것이 사실이다.
재야단체가 정국의 주요한 변수로 등장했던 것은 80년「서울의 봄」당시와 87년 6·29대회 때였고 규모와 크기면에서 강군 치사사건이후 결성된「범국민대책회의」도 이에 버금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80년에는 박 대통령 시해로 정국이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여서 당시 김대중·윤보선씨 등 거물정치인들과 재야인사들을 총망라하고 있던 국민연합의 역할이 중요한 변수였었다.
87년에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개헌을 거부하고 강압통치로 회귀함에 따라 국민저항이 폭발했고 구심체는 야당과 재야가 연합한「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였었다.
국본은 여세를 몰아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1차 목표가 달성된 뒤 사분오열을 거듭하다 1년여만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6공에 들어서면서 재야단체들은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변신」을 하게된다.
80년대 초반부터 민중운동의 개념이 도입돼 광범위하게 확산됨에 따라 80년대 중반부터는 기존정치권을 민주화시키고 자신들이 그 체제 안으로 들어가겠다는 재야세력들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89년1월21일 재야단체를 총망라한 전민련이 결성됐지만 곧바로 내부분열을 시작해 그해 11월 장기표·박계동씨가, 다음해4월 이부영씨가 각각 탈퇴한 뒤 민중당 결성, 민주당입당 형식으로 제도정치권으로 들어감으로써 좋은 의미에서의「재야정치」는 종결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올 들어 재야의친 김대중씨 성향 인사들이 평민당과 합당, 신민당을 발족시키면서 사실상 정치 지향성 재야는 교통정리가 끝난 셈이다.
반면 새로운 재야단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참교육과 교육민주화를 내세운 전교조나 민주교수협의회, 수입개방과 농정실패에 분노하는 농민들의 전농, 도시빈민연합인 전민련,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모임 등 독특한 자기분야의 요구와 목소리를 갖고있는 재야단체들이 속속 생겨났다.
이들은 현정권에 반대하지만 스스로 나서 정권을 쟁취하는 것을 목표로 삼지는 않고 있다.
80년대 말부터의 또 다른 특징은 오랫동안 재야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온 종교단체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민불련 등 종교단체들은 87년처럼 큰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고 명동성당은 더 이상 시위의 메카가 아니다.
기존 재야단체와 성격을 달리하는 시민단체들의 대두도 주목할 만하다.
경실련·공해추방운동연합·시민연대회의·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등 시민단체들은 재야단체들보다 상대적으로 목소리의 톤이 낮지만 나름대로의 분야를 실정, 톡톡히 역할을 해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전체로 보아 재야운동은 90년대에 들어와 전반적으로 쇠퇴국면을 보여온 것이 사실이다.
6공들어 재야연합으로 치른 몇번의 국민대회는 대부분 유명무실하게 끝났다.
잇따른 구속 등 수사당국의 강경대응과 내분으로 위축됐던 재야운동은 강군 치사사건을 계기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있다.
현재 대책회의에는 50개가 넘는 단체들이 가입하고 있지만 전대협·전노협·전교조 등 소위「5전단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동원능력이 미미하다.
이들「5전단체」는 즉각적으로 최소한 2만명 이상을 동원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대책회의는 강군 장례후 임시기구의 성격을 벗어나 새로운 전국적 상시기구로의 발전적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특별히 주도권을 행사하는 단체가 없는 상태에서 50개가 넘는「재야」가 모인 대책회의가 과연 서로의 입장과 방향의 차이를 무난히 극복하고 새로운 운동구심체로 등장 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김종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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