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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영문모르고 끌려간 박정만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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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88년 작고한 시인 박정만씨가 최근 제3회 지용문학상을 수상했다. 수상작은 그의 2주기를 맞아 지난해 출간된 『박정만 전집』에 실린 시『작은 만가』.「사랑이여, 보아라/꽃 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꽃 초롱 하나로 천리 밖까지/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로 시작되는 19행의 짧은 시 『작은 연가』가 우리 시의 정통성과 그 발전에 이바지한 정지용 시정신에 부합된다 하여 고인이 된 박씨에게 순금메달과 상패가 주어졌다.
한국의 전통서정과 서구의 모더니즘을 결합, 한국 현대시의 지평을 열었을 때, 특히 일제 말 암흑기 조지훈·박목월·박두진씨 등 소위 청록파를 발굴해 해방 후 시맥을 잇게 했던 정지용 이데올로기와는 아무런 상관없었던 그의 문학에도 불구, 6·25와중에 납북됐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은 남한에서 40년 가까이 햇빛을 못보다 지난 88년에야 해금됐다. 우연의 일치일까. 사랑과 한을 노래하다 80년대 까닭 모르는 고문에 의해 희생된 박씨가 분단에 의해 희생된 지용의 이름으로 주어진 상을 받은 것은. 「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울지 말아라 벙어리야/미친 오월의 돌개바람이/자지러지게 자지러지게 네 울음을 울어도/말하지 말아라 벙어리야/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아무도 저 하늘을 보려하지 않는구나. /불 먹은 하루해의 봉분 위에/풀잎처럼 쓰러져간 우리네 목숨, /벙어리야 벙어리야/하늘을 바라고 하늘을 바라고/이제 우리 기꺼이 푸른 제(제)의 사슬이 되자.」(『오월의 유서』 전문)
박씨를 죽음까지 몰고간 「미친 오월의 돌개바람」은 무엇인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속 시원히 울지도, 말하지도 못하고 벙어리로 묶어놨던 이른바 「한수산 필화사건」. 81년5월 중앙일보에 연재중이던 소설 『욕망의 거리』가 문제돼 한씨를 비롯, 신문사 관계자들과 함께 수사기관에 끌려가 당한 고문의 전말에 대해 박씨는 속 시원히 털어놓지 못하고 속으로만 그 울분을 삭이다 끝내 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시 곳곳에는 그날의 고통에 대한 흔적이 남아있다. 특히 박씨의 산문들과 미발표시 등을 묶어 금주 내로 출간될 『박정만 산문집』에는 자신이 당한 고문과 그로 인해 피폐해진 심경을 그린 글들이 곳곳 눈에 띈다.
박씨는 출판사 고려원 편집부장이던 1981년 5월29일 아침. 출근길에 출판사 앞에서 기관원 2명에 의해 연행됐다. 서빙고동의 속칭 「빙고하우스」지하실에서 박씨는 2박3일간 모진 고통을 당했다.
「완전범죄를 위해 이처럼 마땅한 장소도 없으리라…. 반항이라는 것도, 함구라는 것도, 자유의지란 것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다」고 박씨가 쓰고 있듯 그는 밑도 끝도 없이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에 의해 육체와 정신을 갈가리 찢겨야했다.
도대체 무엇을 불란 말인가 이틀전 한수산씨가 있던 제주도에 그와 장편소설 출판계약을 하러간 박씨에게 다짜고짜 『한씨의 배후임을 불라』는 그들 앞에서 도대체 불 말도 없는 박씨는 까닭 모르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 박씨에게서 아무런 혐의도 찾을 수 없었던 그들은 『함부로 입을 놀렸다간 큰 탈날 줄 알아라』는 함구령과 함께 그를 풀어 주었다.
「그날 그×년은 국풍장에 갔었대. /내가 그 어두운 지하실에서 /가시면류관을 쓰고 물 먹고 반쯤은 죽어갈 때 /그 소름끼치게 찬란한 국풍장으로. /88호 크기의 창문에 앉아 있던한 마리의 새.」 (『수상한 세월2』 전문)병원에 가 치료받아야될 피멍든 부서진 몸을 이끌고 북가좌동 무허가 판잣집 셋방에 기어든 박씨를 그의 아내는『몇 날 몇 일 술 퍼마시다 또 얻어터지고 들어오는군』하고 외면해버렸다. 함구령이 내려진 상태, 속도 모르는 아내가 야속해 이 시가 욕설로 튀어나온 것일까. 아니 고문이 박씨의 맑고 투명한 시 세계를 여지없이 파괴했기 때문일 것이다.
집에서 막걸리에 한약 한제 달여먹은 것을 고작으로 고문의 피멍을 푼 박씨는 7월초「몸뚱이에 꽃잎처럼 찬란한 문신을 새겨놓았던 그 가증스런 폭력의 발자국과 물과 전기의 세례」를 잊기 위해 수안보·목포·해남· 여수 등의 사찰을 찾아 방황하다 11월초 귀가했다. 귀가하자마자 이혼하자고 하는 아내의 뜻에 따라 14년간 같이 산 아내와 이혼하고 직장에도 자의반 타의반 사표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내도, 직장도 잃어버린 박씨는 그후 세아이들의 밥과 빨래를 직접하며 살아야했다. 먹고살기 위해 박씨는 본명을 숨긴 채 시와는 상관없는 글들을 닥치는 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시와는 동떨어진 글을 오직 먹고살기 위해 써야했던 박씨는 87년 여름 민주화함성이 도도히 흐를 때 다시 시로 돌아가게 된다.
5백 병 정도의 안주 없는 소주를 죽여가며 어떤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에 따라 머릿속에서 들끓는 시어의 화젓가락으로 20여일만에 시3백여편을 써냈다. 그렇게 시로 돌아온 박씨는 이듬해 여름에까지 이르는 1년 사이 시집을 7권이나 펴냈다. 88년8월 친구들의 도움으로 시화전을 개최한 박씨는 한달여 집안에 틀어박혀 술만 마시다 10월2일 서울올림픽 폐회식이 화려하게 개최되던 저녁 홀로 화장실 변기 위에 앉은 채 저 세상으로 갔다. 「나를 죽인 것은 5월의 그날이다. …왜 가십란에도 못 오르는 뭇매가 나를 때리는가. 적어도 나는 건강하게 살려고 했던 이 땅의 보통사람들에 불과했다」고 죽기1년전 펴낸 시집 『저 쓰라린 세월』후기에서 밝히고 있듯 박씨는 보통사람으로서 까닭 없이 당해야했다.『내가 왜 그처럼 당해야했는지 이유나 알았으면 좋겠다』고 수없이 푸념했던 박씨는 그로 인해 아내도, 직장도 잃고 죽음까지 이르게 한 그날 당한 이유를 끝내 풀지 못한 채 42세로 삶을 마감해야했다.
박씨에게 가해진 이 어처구니없는 테러, 80년대 초 「정권의 본때 보이기」에 당한 문인들은 박씨 외에도 더러 있다. 그들은 그때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81년 여름 문인들을 치떨게 했던「한수산사건」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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