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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볼거리에 담긴 반전 메시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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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한.중.일 합작으로 만들어진 영화'묵공'(11일 개봉)은 최근의 중국산 대작 무협영화들과는 분명 다른 미덕을 지녔다. 와이어와 컴퓨터 특수효과에 기댄 과장된 액션이나 원색의 현란한 미술로 승부하려 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전투 장면도 상당한 규모의 볼거리인데, 이를 그려내는 기법은 할리우드 고전 영화의 스펙터클을 보는 듯 아날로그적 감흥이 물씬하다.

무엇보다도 다른 점은, 전쟁을 액션과 볼거리의 쾌감으로만 다루지 않는 시각이다. 당장은 우리편이 이겼을망정 화염 속에 고통받는 적군의 모습이, 전투 이후 산처럼 쌓인 적군과 아군의 시체가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전쟁의 비참함, 살육전의 허망함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시각이다. 원작인 일본만화'묵공'이 바탕에 두었던 주제의식의 연장이다.

주인공 혁리(류더화)는 전쟁에 반대하기 위해 전략과 전술을 연구했던 사상집단 묵가의 일원이다. 춘추전국시대, 자그마한 양나라의 성은 조나라의 10만 대군에 포위돼 백기투항을 고려하는 처지다. 혈혈단신 구원군으로 찾아온 혁리는 화살 한 방으로 조나라 선발대를 물리치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준다. 백성들은 환호하고, 왕(왕즈웬)은 급기야 혁리의 요구대로 병권을 이양한다. 남다른 지략과 지도력을 발휘하는 혁리의 모습에 오만한 왕자 양적(최시원)마저 존경심을 품게 된다.

여느 전쟁액션물과 다른 이 영화의 특징은 후반부로 갈수록 뚜렷해진다. 외형상 혁리에 맞서는 적은 조나라 장수 항엄중(안성기)이다. 하지만 백성을 구하려는 혁리의 이상과 달리 현실의 권력유지에 급급한 양나라 지배층이야말로 혁리와 타협할 수 없는 갈등의 축을 이루게 된다. 혁리의 무기력감은 정작 가장 구하고픈 사람을 구해내지 못하는 결말에서 정점에 이른다.

국내 관객들을 실망시킨 일련의 아시아합작프로젝트에 비하면, '묵공'의 이런 남다른 맛은 적어도 허장성세라는 비판은 듣지 않을 것 같다. '전쟁'을 볼거리로 보여주는 동시에 '전쟁에 반대하는'메시지를 전달하는 점만으로도 이 영화는 도전적이다.

다만 이 두 가지 과제가 조화로운 성취를 보여주느냐는 의문스럽다. 혁리의 남다른 전술이 나온 사상적 배경은 대개 설명체의 대사로 전달하는 반면, 영화가 좀 더 힘을 싣는 것은 그 실행물인 전투장면의 묘사다. 좋게 보면 영화가 보여주는 것 이상으로 관객의 사고를 자극할 요소이고, 나쁘게 보면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가 자칫 앙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 대목이다.

난세의 영웅으로서 혁리의 활약에 스포트라이트를 맞추면서 주변부의 에피소드가 정교하게 연결되지 않는 것도 아쉬운 지점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첩자노릇을 하는 민초들이 등장하건만 극의 흐름 속에서 '황산벌'의 '거시기'같은 여운은 주지 못한 채 사라져간다. '묵공'은 요즘 대작들의 통념과는 다른 길을 택했으되, 통념 이상의 새로운 쾌감까지 맛보게 해주지는 않는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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