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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의 금석학 연구서 '해동비고' 필사본 발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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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추사 김정희(1786~1856.사진)의 금석학(金石學.쇠붙이나 돌에 새긴 글귀를 연구하는 학문) 논문집으로 추정되는 '해동비고(海東碑攷)'가 발굴됐다. '해동비고'란 '우리나라 비에 대한 고찰'이란 뜻이다. 신라 문무왕릉비를 포함해 모두 7개 비석에 대한 추사의 고증이 실려 있다.

추사는 금석문의 대가였다. 그런데 명성에 걸맞지 않게 지금까지 전해지는 저서가 별로 없다. 추사가 자신의 저서들을 두 차례에 걸쳐 모두 불태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금석학 관련해선, 북한산과 황초령의 진흥왕순수비를 고증한 '예당금석과안록'이 전해질 뿐이다.

'예당금석과안록'에서 보여준 고증 능력만으로도 추사는 금석학 분야에서 독보적 지위를 누렸었다. '해동비고'의 발굴로 추사의 금석학이 훨씬 풍성해지게 됐다. 추사 사후 간행된 '완당척독'(1867년)과 '완당집'(1868년)에는 '해동비고'와 '예당금석과안록'은 실려 있지 않다.

?1850년께 필사본=이번에 발굴된 '해동비고'는 1850년께 누군가가 필사한 책이다. 필사자의 신분은 알 수 없다. 이 책은 고문헌연구가인 박철상(41)씨가 2001년 가을 고서점에서 입수했다.

박씨는 "'해동비고'의 앞부분에 '완당등본(阮堂謄本.완당의 책을 베끼다.완당은 김정희의 당호)'이란 표기가 나오고, 비문을 고증하는 중간 중간에 '정희안(正喜案.정희가 생각하다)'이라는 문구가 있어 이 책이 추사의 저작임을 알려주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해동비고'와 함께 발견된 '서책목록(書冊目錄)'에는 '해동비고'라는 서명 아래 쪽에 '김정희편집(金正喜編輯.당시 '편집'은 논문의 의미)'이라는 표기가 있어 추사의 저서임을 알게 했다"며 "필사된 시기는 나와 있지 않지만 지질이나 장정 등으로 볼 때 1850년 전후 필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이어 "추사와 조선.청나라의 저명한 문사들 사이에 오간 편지에 추사의 금석문 연구서 관련 내용이 나오는데 '해동비고'가 바로 청나라 문사들이 애타게 찾던 추사의 금석학 연구서"라고 주장했다. 박씨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논문 '해동비고의 출현과 추사 김정희의 금석학'을 추사특별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27일 오후 2시 발표할 예정이다.

?문무왕릉비문 연대 달라='해동비고'에 실린 비문은 ▶평백제비(平百濟碑.660년)▶당유인원비(唐劉仁願碑.663년)▶경주 문무왕비(文武王碑.687년.김정희의 건립연대 추정임)▶진주 진감선사비(眞鑒禪師碑.887년)▶문경 지증대사비(智證大師碑.924년)▶진경대사비(眞鏡大師碑.923년)▶경주 무장사비(藏寺碑.800년) 등이다.

이 가운데 신라 문무왕비문 건립에 관한 치밀한 고증이 단연 돋보인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비문에 신문왕 '이십오일경진건(二十五日景辰建)'이라고 적혀 있는 점을 들어 문무왕비가 682년 7월 25일 세워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추사는 문무왕비가 687년 8월 25일 혹은 9월께 건립된 것으로 고증했다.

우선 비문에 나오는 '천황대제(天皇大帝)'라는 표현은 당 고종(唐高宗)의 시호이므로 그가 죽은 684년 이후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추사는 684년부터 신문왕 재위(692년 7월) 기간 중 '경진(景辰=昞辰) 25일'을 만족시키는 날짜를 치밀하게 추적해 687년 8~9월 무렵이라고 추정했다.

추사는 탁본으로만 알려진 문무왕비를 자신이 현지 답사를 통해 재발견했다고 적어 놓았다. 1817년 경주 동북쪽 신문왕릉 앞 어느 밭의 돌을 쌓아놓은 둑을 파헤쳐 문무왕비의 하단을 먼저 찾았으며, 이어 인근 풀 숲에서 비석의 상단도 발견했다고 한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문무왕비 하단은 추사가 처음 발견한 셈이다. 상단은 추사 이후 다시 종적이 묘연하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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