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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르포] "누가 대통령 되면 뭐해? 경제 나아지기나 할 것 같소!"

중앙일보

입력

▶새벽 5시10분, 서울 종로구 창신동 인력시장에서 건설 일용직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월간중앙서울 도심은 연일 시위로 몸살을 앓는다. 그 장면 뒤 서민이 겪는 경제적 고통의 실체는 가늠하기 어렵다. 5박 6일간 서울 시내에서 ‘3등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바닥 민심을 훑었다.


경기 침체 “중산층 사라지는데 누가 사겠나?” 청량리청과물시장 상인 L씨
부동산 폭등 “내가 이 나라를 뜨든지,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든지 빨리 결판나야….” 택시기사 J씨
사교육 열풍 “강남 최대 화두는 부동산이 아니라 교육입니다, 교육!” 주부 K씨
정치 불신 “대통령 선거 해라고? 투표할 시간 없지만 할 마음도 없다” 대학 수위 B씨

1. 창신동 건설 인력시장
차 떠나고 남은 사람 수두룩 대폿집에서 울분 달래

인부들을 데리러 온 승용차와 미니버스가 하나 둘 빠져나간다. 오전 5시40분쯤, 남은 사람은 20명 정도. 약 반수가 남성진 씨처럼 오늘도 허탕을 친 것이다.

“오늘은 허탕쳤으니 소주나 한 병 더하지.”

2006년 12월4일 새벽 5시31분, 서울 종로구 이화여대 동대문병원 뒤편 골목길. 창신동 인력시장으로 불리는 이곳은 평일 새벽마다 건설현장 ‘날품팔이’를 위해 속칭 ‘노가다’들이 집합하는 곳이다. 올해 63세인 남성진 씨도 그중 한 명. 반평생을 건설 현장에서 보냈다는 남씨지만, 오늘은 그를 받아줄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유리창에 ‘홍·어·회’라는 큰 세로글씨가 있는 대폿집으로 들어갔다. 2평 남짓한 식당 안에는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노가다가 4명이나 있다. 남성진 씨가 냉장고에서 소주를 꺼낸다. 소주잔은 따로 없다. 맥주 글라스에 3분의 1을 따라 권한다. 자신은 그 잔마저 필요 없다는 듯, 그냥 병째 들이켠다.

주인 할머니가 삶은 돼지고기와 갓 담근 김치를 안주로 내온다. 웬일로 고기가 있나 했더니, 이 동네 사는 노가다 동료가 ‘한턱 쏜’ 것이라고 한다. 원래는 김치가 안주의 전부다. 안주 값은 받지 않는 대신 소주 한 병에 3,000원.

남성진 씨는 아시바(飛階: 건축을 위해 임시로 설치한 계단이나 다리 등의 철구조물) 기술자다. 가족이 없는 남씨는 창신동 쪽방에서 혼자 산다. 따뜻하게 반겨줄 가족도 없이 차디찬 겨울을 나고 있는 남씨는 일거리가 없어 요즘 매일 술이다. 경기가 안 좋은데다 날씨마저 추워지니 자리가 잘 나지 않는다고 한다.

건설경기가 침체한 지는 이미 오래됐다. 건설교통부에 따르면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주택건설 실적은 급격한 감소세를 보여 왔다. 국민의정부 시절인 2001년 잠시 회복세를 보였지만, 2002년을 정점으로 다시 하강했다. 급기야 지난해에는 최근 5년(2000~04) 대비 13.52%나 감소했다. 또 지난 1월부터 10월까지의 주택건설 실적 역시 32만7,292가구가 건설돼 2000~04년 같은 기간 평균인 39만5,327가구보다 17.21% 줄었다.<표1·2 참조>

주택건설경기 침체는 남성진 씨와 같은 건설현장 일용직 근로자들에게 직격타를 날렸다. 서울 시내에 산재하던 인력시장이 하나 둘 명맥을 잃기 시작한 것도 최근 몇 년 새 일이다. 이날 새벽 4시30분쯤 인력시장에 나왔다는 양모 씨가 말을 거든다.

“나는 분당에 산다. 사람이 적어 보여도 이 정도로 큰 인력시장은 이제 서울 시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나 말고도 안산·의정부·부천 등지에서 사람들이 일감을 찾아 이곳으로 많이 온다.”

하지만 이렇게 찾아온 사람들이 모두 일거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오전 4시30분부터 새벽 어둠 사이로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한 사람들은 5시가 조금 넘어설 무렵 피크를 이룬다. 5시15분, 인력시장 네거리에 줄을 선 사람은 눈대중으로 봐도 40명 정도다.

이곳은 용역업체보다 건설현장에서 바로 사람을 데려가는 경우가 많아 오늘 어느 현장으로 갈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았다.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마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인부들을 데리러 온 승용차와 미니버스가 하나 둘 빠져나간다. 오전 5시40분, 남은 사람은 20명 정도. 약 반수가 남성진 씨처럼 오늘도 허탕을 친 것이다.

2. 청량리청과물시장 일대
가게세 벌기도 힘들어…노인 무도장만 門前成市

“한 달에 100만 원도 못 버는데, 이것으로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해?” 그는 그러면서 “기자 양반이라면 여기 와서 일하겠소”라고 반문했다.

청량리청과물도매시장 1번 입구. 들어서자마자 제주산 감귤로 가득 찬 트럭이 눈에 들어온다. 시장 상인과 인부들이 감귤 상자를 나르느라 분주하다. 일견 활기차 보인다.

하지만 대낮인데도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상회’라는 간판을 내건 상점 안쪽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둡다. 날씨가 상당히 추워진 탓인지 무릎 담요를 펼쳐 덮은 상인이 많다.

시장을 반 바퀴쯤 돌았을 때 옹기종기 모여 있는 상인 4명이 눈에 띄었다. 노회한 얼굴 표정으로 미뤄 시장 사정을 잘 아는 터줏대감들 같았다. 가볍게 인사하고 신분을 밝히자 상인들이 잠시 머뭇거린다. 하지만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이들의 말문이 터졌다.

“과일장사 해서 먹고살 만한 시절이 있었지. 그런데 이제는 임차료도 못 벌 판이야.”

간이의자에 앉아 있던 살진 사장님 스타일의 상인 L씨가 먼저 말했다. 옆에 있던 P씨가 거든다.

“한 달 100만 원도 못 버는데, 이것으로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해?”

그는 그러면서 “기자 양반이라면 여기 와서 일하겠소”라고 반문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C씨가 말을 이었다.

“전에 여기서 장사하던 사람이 지금 아파트 경비를 하고 있어. 한 달에 80만 원 받아 교통비 제하고, 뭐 제하고 하면 30만~40만 원 남지만 과일장사 하는 것보다 낫다고 그래. 요새는 아파트 경비 자리도 없어 난리라더구먼….”

상인들과 몇 마디 더 주고받다 청과상인연합회 사무실 위치를 확인했다. 상인연합회 사무실은 2번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새마을금고 건물 2층에 있었다.

연합회 총무이사인 이용춘 씨는 청과시장 경기에 대해 “지난해 대비 수익이 40% 선으로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또 “과일은 기호식품이다 보니 경기에 민감하다”면서 “중산층이 많아야 이런 청과도매시장이 잘되는데, 이런 사람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팔릴 리가 없다”고 말한다.<표3 참조>

상인연합회에서 나오는데 위층에서 트로트 음악과 구둣발 소리가 귀를 때린다. 올라가 보니 상호도 없이 그냥 ‘무도장’이라고 적힌 노인 무도장이었다. 최근 몇 년 새 많이 생긴 신종 경로당이라고 했다.

무도장 앞에서 흰 와이셔츠에 빨간 넥타이와 조끼까지 갖춰 입고 한껏 멋을 부린 채 담배를 피우는 노인에게 말을 붙였다. 경기도 연천에서 온 K(71)라고 했다. “그렇게 먼 데서 여기까지 오시느냐”고 묻자 “나 말고도 남양주·의정부 등 경기도 동부 쪽에서 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여기 입장료가 1,000원이야. 노인들은 (경로우대여서) 교통비도 안 들지, 시간은 많지, 그러니 물 좋은 이곳으로 오는 거야. 문 닫을 때까지 원없이 놀 수 있잖아?”

마냥 즐거운 표정인 K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5분여 사이 7~8명이 무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안을 들여다보니 60대 이상 노인들로 빼곡하다. 무도장 안에는 식당까지 자리 잡고 있어 요기도 해결할 수 있으니 K씨의 말처럼 원할 때까지 놀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과시장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나서자 ‘태평양 카바레’라는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청량리·제기동 일대에서 가장 큰 무도장 중 하나라고 했다. 카운터에 앉아 손님 수를 ‘정(正)’자로 장부에 표시하고 있는 여사장에게 물어보니, 일대에서 무도장·카바레·콜라텍 등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은 노인 무도장 30여 곳이 성업 중이라고 한다.

장부를 슬쩍 훔쳐보니 오후 2시30분인데도 ‘정’자는 이미 십수 개를 넘고 있었다. 이제 청량리에서 유일하게 장사가 잘되는 곳은 시장이나 백화점, 성매매업소가 아닌 노인 무도장 정도가 아닐까 싶었다. 노인들 입장에서는 경기가 안 좋은 상황에서도 입장료 1,000원만 내면 하루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지 않을까.

▶열린우리당 중앙당사 앞 영등포청과물시장의 한 상인이 손님을 기다리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다.

3. 거리에서
택시기사도, 환경미화원도 부동산 거품에 깊은 한숨

“나처럼 전세 사는 사람들은 더 죽을 판이다. 내가 이 나라를 뜨든지,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든지 둘 중 하나로 결판나야 한다.”

11월의 마지막 날 저녁, 선배 기자와 합류하기 위해 시청에서 택시를 타고 삼각지로 향했다. 기사에게 운을 떼어 봤다.

“요즘 부동산이 폭등해 난리라죠?”

기사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울분을 토해 낸다.

“나는 법인택시 운전기사요. 회사에 사입금 내고 나면 본전 챙기기도 힘듭니다. 강남만 오르면 다행이죠. 그런데 지금 서울에서 안 오르는 곳이 어디 있소? 나처럼 전세 사는 사람들은 더 죽을 판이야. 내가 이 나라를 뜨든지, 부동산 거품이 폭발하든지 둘 중 하나로 결판이 나든지, 원….”

민심기행을 하는 동안 만난 사람들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을 강하게 질타했다. 성북역 인근에 컨테이너로 대신한 환경미화원 휴게실에서 노원구 환경미화원인 C(56) 씨를 만났다. 며칠 전 내린 겨울비에 낙엽이 떨어져 일감이 많았는지, C씨의 표정에서는 피곤함이 묻어났다. 성북구 길음동에 전세를 얻어 살고 있다는 C씨는 “낙엽철이 대목이라 쉴 틈이 없다”며 말문을 열었다.

“애가 5명이어서 전세나마 더 큰 곳으로 옮기고 싶었어. 그래서 은행 대출 한 번 받아 볼까 했는데, 주위 사람들이 요즘 특히 대출 조건이 까다로워져 생각도 말라고 하더라고. 그런 말을 들으니 기가 꺾여 은행 문턱에도 못 가 보고 포기하고 말았어.”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렇게 말을 잇는다.

“요즘 워낙 일자리가 없다 보니 젊은 학생들도 이거(환경미화원)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다지만, 환경미화원이 월급을 받아봤자 얼마나 받겠어?”

집이 있는 사람들도 고민이 늘기는 마찬가지였다. 바로 자녀들의 문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울 소재 H대학교 수위인 박모(62) 씨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집을 가지고 있다. “집값이 좀 뛰었느냐”고 묻자 “봉천동 일대도 땅값이 많이 올랐지만, 아파트나 오르지 우리집 같은 단독주택은 안 오르더라”며 자식 걱정부터 했다.

“집값이 오르든 안 오르든 그래도 나는 내 집이 있으니 별로 괘념치 않는데, 자식들이 문제요. 젊은 애들이 쥐꼬리만 한 월급 받아 어떻게 집을 사겠어요? 그렇다고 내가 많이 벌어서 보태줄 돈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서민들의 바람은 집 한 채 마련해 행복하게 사는 것뿐인데, 그런 걸 나라에서 못해 주니 사람들이 힘든 거요. 어디 가서 하소연하겠어? 국가가 알아서 해 줘야지….”

○○교통의 12XX 시내버스를 운전하는 송모(45) 씨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말을 건넸다. 운전석 바로 위에는 CCTV와 음성녹음장치가 설치돼 있기 때문이다. 서울시와 버스회사에서 기사들의 친절 여부 등을 관리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화를 하다 행여 실수라도 할까 봐 조심하는 눈치다.

송씨는 ‘강북의 대치동’이라고 불리는 노원구 상계동에서 산다. 직장에서 가까운 이유도 있지만,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녀석 때문이기도 하다.

서울시가 2004년 7월부터 시내버스 준공영제를 도입한 후 송씨 같은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은 한 달 벌이가 안정되는 등 생활에 여유가 생긴 편이다. 물론 회사마다 사정이 달라 연봉이 일정하지는 않다.

송씨는 그렇게 생긴 여유를 하나뿐인 아들에게 과감히 투자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문제는 아들이 성장하는 만큼 사교육비가 늘어나는 데 있다.

“강남만큼은 아니지만 노원구에도 상당히 많은 학원이 밀집해 있다. 그런데 그중 한 학원이 학원비를 1만 원이라도 올리면 마치 도미노처럼 그 일대 학원이 일제히 학원비를 올린다. 그런 상태가 몇 년 지속되다 보니 학원비를 대기에도 빠듯해졌다.”

아직 전세를 살고 있어 마냥 아들 뒷바라지만 할 수 없는 속사정도 털어놓았다. 그래서 송씨는 이를 두고 “부동산 거품에 학원비 거품까지 더하니 최악의 이중고(二重苦)”라고 말한다.

서울 서초구 ○○동의 24평형대 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사는 주부 K(43) 씨의 견해는 조금 달랐다. K씨는 대기업에 다니는 회사원 남편을 둔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의 주부지만, 강남에서는 서민(?) 축에 속한다. 인근 S부동산컨설팅에 물어보니, K씨가 사는 아파트의 평균매매가는 6억 원, 전세가는 1억8,000만 원이라고 한다. K씨는 무리해서 이 동네로 이사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학원비, 오르고 또 오르고

“폼 잡으려고 이곳으로 이사 온 게 아니에요. 다 우리 애들 좀 잘 키우고 싶어서지. 이 동네의 최대 화두는 부동산이 아닙니다. 교육입니다, 교육!”

하지만 K씨도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 동네 전세값과 자녀당 5군데씩 보내는 학원비 때문에 고충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무슨 부업거리라도 없을까 해서 물색 중이라고 한다.

“애들 학원가방 챙겨 주기에도 바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해 봐야죠.”

이런 걱정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강남에서 마지막 남은 달동네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민들이 그렇다. 이곳에 사는 사람 중에는 일용직 근로자가 많다. 게다가 대부분 맞벌이를 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이 아이들이 간접적으로 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은 공부방뿐이다.

모니카 수녀가 운영하는 ‘바오로공부방’은 구룡마을자치회관 1층에 있다. 이 공부방은 미취학 아동들에게는 ‘새싹놀이방’이 되기도 한다. 시간대에 따라 다른 것이다. 공부방 선생님들은 자원봉사로 나온 대학생들이라고 한다. 30여 명의 아이가 여기서 공부를 한다. 미취학 아동들을 담당하고 있는 한 자원봉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학원에 보내고 싶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어쩔 수 없으니 여기서라도 공부하기를 바랄 뿐이죠.”

▶모니카 수녀와 함께 공부하고 있는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아이들.

4. 영등포 상인들
“제발 장사 좀 하게 당사나 옮겨 주쇼!”

“저것(당사) 때문에 장사가 안 돼 죽겠는데, 뭔 소리여! 시위 한 번 나 봐. 이 일대가 전경하고 데모대로 꽉 막히는데, 어떤 손님이 와?”

국회의원을 139명이나 보유한 열린우리당. 열린우리당 중앙당사는 영등포청과물시장 안에 있다. 하지만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에서 역무원, 지하상가 상인, 노점상인 등 10여 명에게 물어봤지만, 제대로 가르쳐 주는 사람을 찾지 못했다. 열린우리당 당사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불과한데도….

어렵사리 도착한 영등포청과물시장 입구 네거리. 마중이라도 나온 듯 의무경찰 한 명이 진압봉을 휴대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200여m 거리를 청과상회들을 따라 쭉 들어가자 당사가 나왔다. 당사 주위로는 총 13대의 경찰버스가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당사 건물에는 철 지난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국민의 큰 뜻을 받들어 열심히 뛰겠습니다.”

시장의 분위기는 청량리청과시장보다 더 안 좋아 보였다. 당사 바로 맞은편에서 과일장사를 하는 30대의 여주인은 가까이 다가가도 무료하다는 듯 휴대전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1m 앞까지 바짝 다가가서야 손님인가 해서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나마 물건을 사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귀찮다는 반응들이다.

“당사에서 과일 좀 사가느냐”고 묻자 “가끔 사무실에서 쓸 거 조금 사 가는 정도”라고 말한다.
조금 떨어진 다른 가게에 들렀다. 말을 붙이자마자 주인은 대뜸 “저것(당사) 때문에 장사가 안 돼 죽겠는데, 뭔 소리여!”라고 화부터 냈다.

“시위 한 번 나 봐. 이 일대가 전경하고 데모대로 꽉 막히는데, 어떤 손님이 와. 오다가도 돌아가겠구먼. 요새 헤쳐모여니, 분탕질이니 말이 많던데 빨리 당사나 옮기라고 하쇼.”

청과시장을 뒤로하고 이번에는 영등포중앙시장을 찾았다. ‘K상회’라는 속옷가게에 들렀다. “내복 하나 사러 왔다”고 하자 주인이 반기며 맞이했다. 50대 후반의 여사장은 젊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스판덱스 내복을 추천했다. 가격은 붙어 있는 가격표보다 많이 싼 편이었다. 계산을 하면서 신분을 밝히자 묻지도 않은 답변이 돌아온다.

“경기도 안 좋은데, 열린우리당 당사 때문에 장사가 더 안 된다.”

거리가 좀 떨어진 지역임에도 시위가 벌어지면 청과시장부터 이곳까지 경찰버스와 시위대로 도로가 막힌다는 것이 여주인의 설명이다. 한마디로 이 일대 상권은 열린우리당 당사 때문에 경기 몸살을 한층 더 심하게 앓고 있다는 말이었다. 가게 문을 나서는데, 여사장이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여기 사람들은 절대 열린우리당 후보 안 찍을 거야! 다들 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며칠 뒤 다시 영등포를 찾았다. 열린우리당 당사 앞은 확성기 소리로 시끄러웠다. 전날부터 노숙 시위를 했다는 민주노총 산하 한 단체의 조합원 20여 명이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식당가를 둘러보기로 했다. 당사 사람들 입이 꽤 되니 그나마 식당은 잘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열린우리당에 확인한 결과 중앙당사 상근자만 80~85명 정도란다. 하지만 기대는 빗나갔다. 당사 사람들이 몇 군데 지정해 놓고 먹는 식당을 제외하고는 과일가게나 마찬가지였다.

당사 사람들이 지정해 놓고 먹는다는 식당조차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근처 다른 식당의 주인은 “저거 들어봐라. (시위 때문에) 시끄러워 죽겠다. 밥 안 먹어도 좋으니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고 짜증을 냈다.

▶불경기로 인해 빈 택시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5. 다시 거리에서
범여권 대권주자 관심 저조…경기 살리기에 기대감

올해 말 대통령선거에 대해서는 ‘무관심’ 그 자체였다. 한마디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잘할 것 같지도 않고, 먹고살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반응.

밑바닥 사람들은 새해 최고의 화두이자 이벤트가 될 제17대 대통령선거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번 민심기행에서 빼먹지 않고 질문한 것이 바로 이 대목이었다.

범여권 대선 주자들에 대한 관심은 지극히 낮았다. 10%를 밑도는 정부와 여당 지지율 수치를 그대로 반영하는 듯했다.

영등포시장 상인 S씨는 대뜸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를 편들고 나선다. “섬세한 사람이니 (정부)살림을 참 잘할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뚜렷한 이유는 대지 못했다. 또 다른 상인 Y씨는 “솔직히 이회창 씨가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최근 현실정치와 관련한 발언으로 관심을 끌고 있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에 대한 잠재지지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유력 대권주자 중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현재 여론조사 지지율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었다. 건설경기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지, 창신동 인력시장에서 만난 일용직 근로자들은 한결같이 이명박 씨를 지지하고 나섰다. 황모(62) 씨는 “적어도 서민들 굶어 죽게 하지는 않을 것 같다”면서 “노무현이 대통령 하는 동안 죽었던 경기를 살릴 만한 인물은 이명박뿐”이라고 단언했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 하나로클럽에서 만난 주부 박모(53·분당 거주) 씨 역시 “경제가 성장해야 먹고살 거리가 생기고, 주부들 장바구니도 넉넉해지지 않겠느냐. 이명박 씨라면 기대해 볼 만할 듯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명박 전 시장에 대해 우려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개인택시 운전사 정모(56) 씨는 “그 사람 별명이 불도저 아니냐. 지금도 부동산 때문에 죽겠는데, 운하다 뭐다 해서 자꾸 개발만 하다 보면 더 뛰어 폭발할 것 같다”며 개발 중심의 정책공약을 비판했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인기가 높기는 했지만, 대세는 ‘무관심’이라고 할 만했다. 한마디로 “누가 대통령이 되든 잘할 것 같지도 않고, 먹고살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펼쳐지면 사정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2006년 연말에 만난 민초들에게 당면한 문제는 ‘먹고사는 문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김상진_월간중앙 기자
[kine3@joongang.co.kr]

<월간중앙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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