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성·싱싱한 연출감각 돋보여|「91단막극 제」를 보고…김미도<연극평론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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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화창한 봄 무대에 상큼한 단막극 4편이 한꺼번에 선보였다. 이번「91단막극 제」(30일까지 학전소극장)에는 그동안 소품이라는 이유로 공연에서 소외되었던 기성작가들의 실험성 충만한 단막극들이 발굴되었고 여기에 젊은 연출가들의 야심찬 의욕이 합세해 색다른 감각을 풍성하게 제공해 주었다.
이하륜 작, 김아라 연출의『의복』은 동화 같은 유아적분위기 속에서 인간 존재의 허무와 절망을 드러낸다. 허술한 잠옷 차림의 할멈은 마치 광대처럼 보이는 영감에게 자꾸만 화려한 새 옷을 요구하며 그 옷을 입고별을 찾아가려 한다. 여기서『별』이란 인간이 본질적으로 추구하는「행복」의 상징일 것이요, 의복이란 한낱 곁 치레 장식일 뿐이다. 할멈은 인생의 여정을 표 상하는 녹색 옷·빨간 옷·노란 옷·파란 옷·검은 옷을 덧입는 동안 끝없이 부질없는 욕망과 허영을 탐하지만 그 요란한 허식 때문에 남편조차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는 처절한 고독 속에 죽음의 옷에 휩싸인다.
인간생활에 가장 필수적 요소의 하나인 의복을 소재로 인간 실존의 한 단면을 극명하게, 그러나 부조리한 수법으로 포착한 원작이 산뜻했고 여기에 빠른 진행의 천진스런 놀이형식을 도입한 연출이 절묘하게 결합됐다. 이호성·노영화의 연기호흡도 매우 뛰어났다.
신명순 작, 김철리 연출의『왕자』는 강인함과 연약함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인간의 본래적 이중성을 날카롭게 묘 파한 작품이다. 용맹과 지혜를 자랑하는 고구려의 둘째 왕자는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며 낙랑 침략에 나선다. 그런데 그 왕자를 사모하는 낙랑공주는 사랑을 완성하고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자명고를 찢어 왕자를 돕고 처형당한다. 전승을 모두 자기의 공으로 돌리며 기고만장에 사로잡혀 있던 왕자는 차츰, 낙랑공주의 참 용기를 깨닫고 자살하게 된다.
이 작품은 특히 연출가의 독창적인 해석력이 돋보였다. 무대 감독 역을 따로 설정했고, 배우들이 간편한 복장으로 등장해 직접 분장과 의상을 갖춰 가면서 연극의 놀이 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기법은 먼 옛날의 이야기를 범 시대적으로 보편화시키는데 톡톡히 기여했다. 또, 무대 벽이 갈라지며 피가 튀고 배우들의 얼굴과 옷에 선혈이 낭자해지는 잔혹한 장면들은 상당히 전율적이었다.
윤조병 작, 채승훈 연출의『건널목 삽화』는 한밤중에 어떤 철도원이 갑석이라는 낯선 사내와 만나 무의미한 대화를 나누는 작품이다. 두 팔이 없는 갑석이 두 다리가 없는 을 석이라는 친구와 기묘하게 합성하여 살던 이야기가 띄엄띄엄 전해진다. 전후의 상처와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갑석의 사연은 다만 아내가 음 행하는 시간을 견디려 했던 철도원의 회의적 삶을 통해 공허한 메아리로 남게 된다.
정복근 작, 심재찬 연출의『삶』은 종가 장손 며느리로 출가했으나 남편이 딴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모진 세월을 감 내하며 살아온 한 노파가 임종의 순간에 돌아온 남편을 받아들인다는 줄거리의 모노 드라마다. 깔끔하고 단아한 연출과 연기는 싱그러웠으나 노파의 대화 상대가 불분명하다는 점, 진부한 유형에 속하는 노파의 삶이 오늘에 주는 의미가 모호한 점 등이 결함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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