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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만 제대로 환자판정(죽음 부르는 직업병:중)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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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면폐증·잠수병등 새 병은 빠져/야박한 검사기준… 희생 늘어/절반의 영세업체 근로자/건강진단 못받아 무방비
­90년 10월21일 고려대 혜화병원에서 납중독으로 사망한 전화선로원 정태문씨(사망당시 56세).
정씨는 69년 한국통신에 입사한 이후 줄곧 맨홀에서 전화케이블을 납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해오던중 75년 심한 복통,손발저림 등 납중독증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후 10여년동안 산재판정을 받지 못해 좁은 공간에서 납증기를 마셔야 하는 생활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 정씨는 신경근육의 마비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망쳤다.
86년 12월에야 직업병 판정을 받고 여러번의 입원치료를 거쳐 겨우 몸을 가누는 상태였던 정씨는 1년이상 병가를 허용치 않는 당시의 사규에 따라 무리하게 출근했다가 납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쓰러져 7개월간 의식불명으로 누워있다 끝내 숨졌다.
­88년 7월2일 여의도 성모병원에서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사망당시 15세).
문군은 주경야독의 꿈을 불태우며 시골에서 상경,87년 12월 온도계 제조회사인 협성계공에 입사했다.
그러나 취업 두달도 못돼 머리가 아프고 팔다리가 떨리며 밤에 잠을 못이루는 증세가 나타났으며 이빨도 두개나 빠졌다.
88년 2월 휴직계를 제출하고 여러 병원을 전전하던중 3월14일 서울대병원에서 수은중독 진단을 받았다. 노동부에 산재요양신청을 냈으나 「입증 불충분」으로 줄곧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물 한모금까지 다 토해내는 고통속에서 숨지기 직전 가까스로 인정이 됐지만 이미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였다.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는 이같은 사례들은 직업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그동안 얼마나 소홀히 취급되어 왔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노동부의 통계에 따르면 90년 한햇동안의 직업병 판정을 받은 근로자는 모두 1천6백38명이며 질병별로는 ▲진폐 1천3백75명 ▲난청 2백1명 ▲납중독 33명 ▲유기용제 중독 6명 ▲기타 23명 등이다.
이 숫자만 놓고 보면 직업병이 그리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직업병 판정을 받지 못했을 뿐 사실상 직업병 환자라고 할 수 있는 직업병 유소견자수를 보면 89년의 경우 모두 7천5백68명에 이르고 있다.
질병유형별로는 ▲진폐 3천9백37명 ▲난청 3천4백10명 ▲크롬중독 1백35명 ▲납독 27명 ▲기타 화학물질중독 23명 ▲유기용제중독 21명 ▲수은중독 2명 ▲진동신경염 2명 ▲기타 11명 등이다.
이 숫자들을 비교해 보면 직업병 유소견자의 20% 가량만이 직업병 판정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노동부의 직업병 판정이 야박하다는 얘기다.
직업병 환자의 질병유형에서 나타났듯이 이미 재래형 직업병이라 할 수 있는 진폐·난청이 전체의 95%를 차지하고 있으며,원진레이온에서 문제가 된 유기용제나 기타 새로운 산업의 등장에 따른 직업병은 거의 통계에 잡혀있지 않다.
화학물질만 하더라도 현재 사용중인 품목이 6만여종에 이르고 매년 1천여종이 새로 개발되고 있지만 이에 대한 유독성 여부가 명확히 가려지지 않은채 근로자들은 생산현장에서 오염·중독에 방치되어 있는 실정이다.
또 최근 의학계에 속속 보고되고 있는 신종 직업병,예를 들어 면방공장 근로자의 면폐증,용접공들의 용접공폐증,잠수부들의 잠수병,컴퓨터터미널 사용자들의 VDT증후군 등은 아직 「직업병」으로 「대접」도 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게다가 산재보상보험법의 적용을 받지않는 5인미만 사업장 근로자들의 경우 의무건강진단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어 전체 근로자의 절반가량이 현실적으로 직업병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직업병 실태에 관한한 정부의 통계수치보다 민간의료운동단체와 일부 학자들의 조사·연구자료가 더 믿을만하다는 지적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김동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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