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2세 시대(12)땅 파고 집 짓는 것 만으론 성장에 한계|해양·우주 사업 "노크"|대림그룹 이준용 부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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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이준용 대림그룹 부회장(53)은 지난해 건설업체인 대림산업에 해양 사업부를 새로 만들었다.
해저 유전 등 각종 자원을 탐사·발굴할 수 있는 플랜트를 만들어 말기 위한 것으로 이미1백억 원 가량을 투자해 놓았다.
관급 공사 비중 줄어 올 들어서는 건설·유통업에 적합한 종합 전산 정보 시스템의 발·판매를 목표로 50여명으로 구성된 정보사업팀도 새로 만들었고, 조만간 우주사업 쪽에 진출할 계획도 세워 놓고 있다.
땅을 파고 집을 짓는 토목·건축 사업만으로는 더 상의 성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다.
재계 랭킹 12위 권(89년 매출액 기준)에 올라 있는 대림은 갑자기 큰 회사는 아니다.
39년 건설·목재업 위주의 부림 상회로 출발, 50년대에 이미 재계 25위 권에 끼었었고 2∼3년에 한 계단씩 꾸준히 올라왔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관급 공사, 해외에서는 월남(60년대)·중동(70년대)특수에 힘입어 성장해 온 점에서는 다른 여느 건설업체와 다를 바 없다.
지금은 계열사가 13개에 이르고 있지만 건설·부동산을 직접 다루는 대림산업·(주)삼호·대림흥산·고려개발 외에도 대림 콘크리트 공업과 엔지니어링 및 건자재를 만드는 대림요업 등 건설관련 업체가 절반을 넘고 건설부문 매출이 그룹 전체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잘 될 때는 무섭게 풀리지만 불황 때는 어려움을 겪는 등 경기변동에 따라 굴곡이 심한 것이 건설업이다.
대림도 이 때문에 몇 차례의 위기를 겪어야 했다.
80년대 들어 중동경기가 퇴조하면서 모 기업인 대림산업의 매출이 85년 7천6백억 원대에서 87년 5천2백억 원대로 떨어지기도 했다.

<대학서 강의 맡기도>
86년의 독립기념관 화재, 88년이란 망간 가스 정제 공장에서의 이라크 공습사건 등은 기업 이미지 실추와 함께 물적·인적의 큰 손실을 가져왔고 이 때문에『그룹이 흔들린다』는 소문이 나기까지 했었다.
관급 공사는 더 이상 성장의 밑천이 되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독립기념관·평화의 댐 등 굵직굵직한 프로젝트들을 잇따라 따내 왔음에도 불구, 전체적인 관급 공사의 비중은 85년 78·3%에서 이제(90년)는 36·6%까지 낮아졌다.
건설 쪽이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을 때 대림을 살려준 것은 석유화학이었다.
79년 인수, 87년 대림산업에 합병된 호남 에틸렌이 물건이 없어서 못할 정도의 호황이 불어왔고, 지난해에는 대림산업 내에서만 보면 석유화학 매출이 건설부문 매출을 넘어서기도 했다.
89년에는 여천 제2공장을 준공, 기초 원료인 에틸렌 생산능력을 연간 65만t규모로 늘려 업계 서두로 부상했는데 대림은 앞으로 폴리에틸렌·프로필렌 등으로의 수직계열화를 통해 석유 화학분야를 계속 키워 나갈 생각을 갖고 있다.
이와 함께 건설 쪽에서는 단순건설보다는 제철·석유화학 공장 등 플랜트건설과 해양·우주사업 등을 통해『수주에서 개발위주로의 전환을 통한 고부가가치화를 꾀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대림은 특히 60년대부터 다른 어느 업체보다 일찍이 플랜트 쪽에 눈을 떴고 지금까지 국내외 3백여 건의 발전소·유화공장 등 플랜트 건설 경험을 갖고 있다.
플랜트는 이 부회장이 집중적으로 관심을 쏟는 분야다. 그는 그룹 경영 참여초기부터 플랜트사업의 중요성을 강조, 설계도면 등 기술을 파는 대림 엔지니어링을 설립했고 기술연구소·컴퓨터 시스템 등도 업계 처음으로 도입했었다.
「플랜트는 대림」이라는 평도 이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 부회장은 다른 2세 총수들에 비해 매우 보수적이라는 평을 얻고 있다.
그룹마다 기업규모가 늘면서 계열사들을 통합·조정하는 기구들이 잇따라 도입되고 있으나 대림 그룹에는 아직「종합 조정실」이 없다.
모 기업인 대림산업 기조실에서 계열사 관련 기본자료를 챙기는 정도이고 기조실 직원수도 40여명에 불과하다.
「그룹」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한 것은 창립 50주년이 되던 지난 89년부터였다.
이 부회장은 인사에서도 능력보다는 연공서열을 훨씬 중시하는 스타일이다.
이직이 적은 반면 승진은 타사보다 2∼3년 이상씩 늦어 대림에는 입사 20년 이상 된 부·차장 급이 수두룩하다.
그룹 내 계열사간 임원 이동도 한해에 1∼2명 정도에 불과하다. 이 부회장의 부친인 이재준 회장(74)은 국민학교만 나온 뒤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궈 냈다.
그러나 경기고·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이 부회장은 미국 유학(덴버대)까지 다녔고 입사 전에는 숭전 대와 영남대에서 강의를 맡기도 했다.
이 부회장의 경영기조는 기본적으로「질서」와「안정」에 있다. 그는 남의 앞에 나서기를 매우 꺼려한다.「감투」도 당연 직인 전경련이사·건설협회 부회장 정도다.
주말마다 등산을 하지만 혼자 또는 가족·직원들과 함께 다니며 외부사람과 산행을 하는 법은 좀처럼 없다.
최소한 3∼4시간이상 걷는 곳을 택해『물을 많이 마시면 목이 더 마른다』며 오이 몇 개 만 들고 다닌다.

<이재학씨가 백부>
그는「짜다」는 지적을 받을 만큼 검소하다. 집에 에어컨을 단 것이 재작년이었다. 이 부회장의 보수성향은「대물림」기간이 길었던 데다 집안의 독특한 가풍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강사였던 이 부회장은 지난 66년 대림이 첫 해외건설에 나서면서 월남지사의 수주담당계장으로 2세 수업을 시작했다.
당시 부친인 이 회장은『내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야 다른 사람도 따라간다』고 했다. 2년 남짓 후 귀국한 뒤에도 과장·부장·이사·전무 등을 차례로 거쳤고 2년 뒤인 79년에야 대림산업 사장을 맡게 됐다.
88년 부회장이 돼 사실상의 경영대권을 이어받았으나 아직 부친이「회장」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매일 출근, 이 부회장이 주재하는 매달 한차례씩의 사장단회의에도 참석하며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완전한 권력 이양은 되지 않은 셈이다.
이 회장은 경기도 시흥에서 4백여 년 동안 대를 이어온 전주 이씨 선비집안 출신으로 아들에게 경영수업을 시키는 과정에서도 답답하리만큼 엄격한 유교적 가풍을 그대로 전수시켰다.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이 회장의 친형이다. 이 부회장의 보수성향은 이같은 가풍의 영향을 받은바 크다.
그러나 그도 이체는 변화를 찾고 있고 적극적인 변신에 나서고 있다. 시대가 변하고 있고 업계의 환경이 급격히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 식 페레스트로이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민병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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