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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잇는 일제하 한인 참상자료|배상 등「전후처리」다시 현안으로 등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일제시대 징병·징용·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재일한국 동포들의 참상을 알리는 관련자료·명부들이 최근들어 잇따라 발견되고 있다
한일간의 전후 처리문제가 계속 현안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일 일본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있는 연합군 총사령부(GHQ) 자료 속에서 오키나와 전쟁 때 포로가 된 징병·징용자 1천6백명의 명부가 새로 발견됐으며 이 가운데 정신대로 추정되는 1백명 정도의, 여자이름도 끼여있어 충격을 주고있다.
또 지난 6일에는 종전직후 일본군이나 일본주민들이 사할린현지 한인동포를 습격, 어린이·여성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했음을 보여주는 소련측 재판기록을 한 일본사진작가가 입수, 공개함으로써 자칫 인멸될 뻔했던 「일본인의 잔학현장」이 새로 드러나게 됐다.

<어린이·여성학살>
지난달에는 북해도 시베쓰마을 해군항공기지 건설공사장에 8세짜리 한국동포 어린이가 취조 중 병사했음을 알려주는 「매화장인허가증」이 공개됐다.
2차 대전 말기 시베쓰마을에는 구 일본해군의 항공기지가 건설되었으며 이 지역 향토사가는 한국동포 약 2천명이 이곳에서 일했음을 확인, 이 지역에서 많은 재일 동포들이 고된 노역에 못 이겨 사망했음을 생생하게 전했다.
이처럼 징병·징용자들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자 지난 1일 일본국회도 이 문제를 거론, 가이후 총리가 답변을 통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조사를 실시, 진실을 밝혀내겠다』고 말했으며 사카모토 관방장관도 이를 받아 한인강제 연행자 명부조사에 대해 『앞으로 한일간 신시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노동성을 중심으로 구체적 조사를 계속 실시해 나갈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일본 정부당국이 과연 얼마만큼 성의를 갖고 명부확인 작업을 추진해 나갈지 의문시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이미 지난 3월5일 노동성을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해 온 「조선인 강제연행자 명부」의 사본을 주일한국대사관에 인도, 이로써 『확인작업, 상황 끝』임을 정식으로 통고한 바 있다.

<일 조사종결 통고>
이때 인도된 명부는 지난해 8월7일 노동성이 발표한 7만9천5백78명에 새로 발견된 이와테 현과 오사카 부 구 일본제철주식회사작성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미불금공탁보고」(4천6백20명)와 몬베쓰 시립향토박물관보유 「피보험자 자격취득 계철」(2천5백88명)을 추가, 모두 9만8백4명분에 불과하다.
노동성은 이 명부를 한국측에 인도하면서 『조사종료는 아니며 금후도 계속조사·확인하겠다』고 말했지만 새로운 명부발견을 위한 적극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사실상 조사가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미 공개된 구 일본제철소사건등 세 가지 사례도 일본참의원사무소, 사진작가, 향토역사학자 등 모두 민간에 의해 발굴·공개된 것들뿐이다.
노동성이 당초 지난해 8월7일 독자적으로 조사, 발표한 7만9천명분의 명부도 발표직 후 「조선인 강제연행실태」를 조사하는 민간단체나 관계자들의 강력한 항의를 받고 보충했으나 새로 추가된 부분도 모두 민간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한국측에 인도된 명부내 한인 숫자는 전후 미군전략폭격조사단이 확인한 66만7건6백84명의 약13%에 불과하다.
이처럼 징병·징용자들의 명부가 드러나고 있음에도 불구, 이들에 대한 전후배상이 전혀 되지 않고 있음을 지적, 일본의 양심적인 지식층들은 일본당국이 「전후배상심의회」를 총리 직속으로 설치, 해결하도록 촉구하고 나섰다.

<배상문제에 냉담>
지난 4일 참의원 예산위에서 사회당 다케무라 의원은 제2차 세계대전중 일본인신분으로 징병되거나 군속으로 징용된 재일 한국·조선인의 전후 배상문제를 다루기 위한 심의회 설치를 촉구했다.
다케무라 의원은 종전 후 군사재판에서 B, C급 전법으로 취급, 기소된 재일 한국인동포 29명이 석방을 청구했지만 최고재판소에서 기각된 사실을 지적하면서 일본인으로 애꿎게 희생당한 사람들로 일본에 살고있는 재일 동포들에 대한 전후배상을 어떻게 할거냐고 따졌다.
그러나 일본 정부당국의 답변은 너무나 냉정했다. 야나기이 외무성 조약국장은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규정한 한국의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법에 따르면 47년 이후 일본에 남아있는 자(재일동포)는 제외된다』고 답변했다.

<한국정부 나서야>
그는 또 『원호법은 은급법에 준거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국적인 자에 한정되며 한국인에게 적용되지 않는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식민 일본인으로 끌려나가 일본인을 위해 총알받이가 된 재일 동포들은 전범으로 취급, 징역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한국인 국적을 갖고있으니 보상받기도 힘들다는 주장이다.
일본당국은 전후처리문제가 자신의 문제로 닥치면 더 할 수 없이 철저하다.
오는 16일 고르바초프 소대통령의 방일을 앞두고 종전 후 시베리아에 끌려가 혹독한 포로수용소생활을 한 시베리아 일본인억류문제와 관련, 일본정부가 완전한 억류자명부를 소련당국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 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 같은 일본정부의 요구에 따라 시베리아에서 사망, 매장된 일본인명부중 약 80%분과 매장장소 리스트를 방일시 지참, 일본측에 인도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소련측은 사망자를 약 4만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일본측은 이의 약 세배는 사망했을 것으로 주장하고 있어 이를 둘러싼 전후처리협의가 주목된다.
가해자 일본과 달리 피해자이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일제징용·징병·정신대로 희생된 한국동포들의 한을 한국정부가 직접 나서서 물어야 한다는게 일본인을 포함한 많은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동경=방인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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