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 화가 배운성 40년만에 "햇빛"|『월간미술』 4월호에 작품 등 발굴 특집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월북 화가 배운성-. 그 동안 베일에 가려져 왔던 그의 생애와 업적이 40년만에 본격적으로 조명돼 관심을 모은다.
배 화백은 우리 나라 최초의 유럽 유학생으로 유럽 화단에서 활약했고 귀국 후 국전심사위원, 홍익대 초대 미술학과장 등을 역임하는 등 중요한 화가였으나 월북 후 국내 화단에서 잊혀졌던 인물이다.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4월호는 국내외 현지 취재를 통해 그의 생애와 작품 활동을 조명하고 작품·기록사진 등 희귀 자료 50여 점을 발굴, 공개하는 특집을 실었다.
이 특집에 따르면 배운성 화백 (l90l∼?)은 1923년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간 미술유학생 1호였다. 지금까지는 1925년 파리로 건너갔던 고 이종우 화백이 최초의 유학생으로 알려져 왔었다.
배 화백은 그후 1940년 귀국할 때까지 독일과 프랑스를 무대로 빛나는 활약을 보였다.
1901년7월13일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난 배 화백은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일본에 건너가 중앙대와 와세다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3년 후 당초 계획을 바꿔 베를린으로 미술 유학을 떠나 에벤푸크 미술학교에서 1년간 공부한 뒤 1925년 베를린 예술학교에 입학,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았다.
그의 유럽에서의 미술 활동이 국내에 처음 알려진 것은1927년. 파리의 살롱 도톤 공모전에서 목판화 『자상』이 입선한 사실이 국내 신문·잡지에 소개됐다.
그는 1933년 와소르 국제미전에서 『밀림』 『여인 초상』 등을 출품, 1등상을 차지한 이후 베를린·함부르크·프라하 등 유럽 전역을 무대로 개인전을 열었다.
특히 1938년엔 당시 세계3대 화랑으로 손꼽히던 파리의 샤르팡티에 화랑에서 개인전을 가졌으며 파리 박물관이 그의 작품을 구입, 소장하는 등 명성을 날렸다.
배 화백은 특히 목판·석판·동판화 등 다양한 판화 기법을 익혀 국제전에서 수상함으로써 우리 나라 판화 역사에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다.
그의 작품들은 주로 한국의 전통 풍습을 소재로 한 것들로 한복 입은 남녀노소가 많이 등장했으며 『섬세한 필치와 우수한 명암법으로 고전적 한국의 특질을 갈 표현했다』는 평을 받았다.
배 화백은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1940년9월 국내로 돌아왔다. 그는 해방 후 제1회 국전에 추천 작가로 『성호』를 출품하면서 심사위원으로 참여했고 1949년 설립된 홍익대 미술과의 초대 학과장을 역임했다.
정부 수립 직후 보도 연맹과 6·25전쟁 중 적하 서울의 조선 미술가 동맹에서 활동하던 배 화백은 월북 후 평양미술학교 교수를 지내다 10여년 전 사망한 것으로 최근 알려졌다. 현재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그의 풍속화 한 점이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창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