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세로 타계한 제럴드 포드 전 미 대통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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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74년 8월 8일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물러난 다음날 부통령으로서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72년 6월 17일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공화당의 닉슨 재선위원회 측이 워싱턴의 워터게이트 빌딩에 입주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를 도청하려 한 사건이다. 재선에 성공한 닉슨은 이를 은폐하려 했으나 진상이 밝혀지고, 의회가 탄핵하려 하자 사임했다.

포드는 그러나 취임 한 달 뒤 닉슨 시절 발생한 모든 범죄에 대해 기소 전 사면령을 내려 여론의 강력한 비판을 받았다. 이는 76년 대선에서 그가 지미 카터 당시 민주당 대통령 후보에게 패배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닉슨 사면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용기 있는 결단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포드의 대통령 재임 기간은 895일로 짧은 편이다. 그는 그러나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장수한 기록을 세웠다. 그는 대통령이나 부통령에 선출되지 않고서도 대통령이 된 기록도 가지고 있다. 닉슨 대통령 시절인 73년 10월 부통령이던 스피로 애그뉴가 수뢰 혐의로 사임하자 포드는 닉슨의 지명으로 부통령이 됐고, 10개월 뒤엔 대통령직도 물려받은 것이다.

닉슨은 당시 공화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포드와 함께 로널드 레이건(캘리포니아 주지사), 넬슨 록펠러(뉴욕 주지사) 등을 부통령 후보로 검토하다 포드를 골랐다. 포드는 재임 중 닉슨과 달리 솔직한 대통령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취임사에서 "나는 국민 여러분의 손으로 선출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며 "그래서 여러분의 기도로 인준을 받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오랜 국가적 악몽은 끝났으며, 이제 (닉슨 때와는 달리)헌법이 작동할 것"이라며 법치를 다짐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론 헬싱키 협정을 꼽을 수 있다. 75년 8월 스웨덴 헬싱키에서 소련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공산당 서기장 등 34개국 지도자들과 함께 서방국이 소련과 동구의 체제를 인정하고, 경제지원을 하는 대가로 인권 개선을 요구하는 협정을 맺었다. 소련과 동구에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을 확산시켜 공산권의 몰락을 재촉하는 초석을 닦은 것이다.

재임 중 두 명의 여성에 의한 암살 기도를 모면할 정도로 운이 좋았던 포드는 그러나 베트남전에선 패배의 아픔을 겪었다. 75년 4월 월맹군이 사이공을 함락하자 그는 "나라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래의 어젠다에 매진할 때"라는 연설을 해야 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혼란의 시기에 나라를 이끌었던 포드 전 대통령은 정직성과 상식, 친절함으로 대통령직에 대한 시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데 기여했다"는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워싱턴=이상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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