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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충무로 언니'들이 연말을 웃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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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미녀는 괴로워'

영화 '미녀는 괴로워(이하 미녀)'가 추석 대목 이후 침체한 충무로에 모처럼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14일 개봉한 이 작품은 성탄 연휴를 거치며 25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9월 말 개봉한 '타짜'이후 최고의 흥행 성적이다. 21일 개봉한 '올드 미스 다이어리'(이하 올미다) 역시 관객들의 호평이 상당하다. 모두 20~30대 미혼 여성, 이른바'언니'들이 주인공인 코미디다. 연애도, 일도 불투명한 미혼 여성의 심경과 세태를 소재로 한껏 웃음을 만들어내는 동시에 이를 판타지로 위로하는 솜씨가 빼어나다. 다음주 개봉하는 '언니가 간다(이하 언니)'역시 겨냥하는 과녁이 비슷하다. 경쟁 치열한 연말 대목 극장가에서 예상하지 못한 흥행 성적과 만듦새로 눈길을 끄는 이들 영화의 재미를 짚어본다.

#'언니의 욕망'을 짚다='미녀'의 성공에 대해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여성들의 욕망을 모처럼 정확히 건드렸다"고 평가한다. 외모든 인생이든 바꿔보고픈 관객의 마음을 제대로 반영했다는 지적이다. '미녀'는 100㎏에 육박하는 미혼 여성 한나(김아중)가 전신 성형수술로 완벽한 미녀가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뚱녀가 미녀로 바뀌는 변신의 쾌감도 쾌감이지만, 코미디가 재미있다. 변신 전후 뚱녀가 겪는 설움과 미녀가 받는 지나친 환대가 대비되면서 남녀 모두 쉽게 공감할 만한 웃음을 만들어낸다. 성형수술이라는 논란 많은 방법을 택하면서도, 그 선택에 큰 반감이 들지 않도록 요리한 것도 오락영화로서 장점이다.

이처럼 미혼 여성인 주인공을 내세워 세태와 심경을 대변하는 것은 '올미다'도 마찬가지다. 줄거리만 간추리면 직장에서 연하남에 눈독 들인 30대 미혼 여성 미자(예지원)의 연애 코미디 같지만, 늘 주변에서 구박당하던 그녀가 작심하고 심경을 토로하는 장면이 가슴 찡하다. 주인공의 일상을 과장된 코미디로 희화화하면서도 그 울분을 놓치지 않고 전달하는 것이다.

'언니'에서 주인공 정주(고소영)가 시간여행을 떠나는 것 역시 연애도, 일도 막다른 골목에 정체된 현재의 인생을 바꾸고 싶어서다. 정주는 바람둥이 첫 애인에 혹해 인생을 망쳐버렸다고 믿고, 과거로 돌아가 아직 고교생인 정주(조안)가 훗날 크게 성공할 모범생과 연애를 하도록 공작을 벌인다.

'언니가 간다'

# 자신감 회복 … 소박한 판타지=이런 그녀들은 일이든 사랑이든 하나같이 속칭 '잘나가는 것'과 거리가 먼 게 공통점이다. '미녀'의 한나는 미녀 가수의 노래를 대신 불러주는 그림자 가수이자 폰섹스 상담원이다. 연애는 늘 상대에게 이용만 당하는 처지다. '올미다'의 미자는 변변찮은 단역을 간신히 맡는 성우이고, 거듭된 연애는 대개 비참하게 끝나 버린 상태다. '언니'의 정주는 한때는 디자이너가 꿈이었지만 현재는 패션쇼의 보조 역할에 불과하다.

처지가 이런 만큼 이들의 변신은 관객의 눈높이에서 한결 친근한 판타지로 다가온다. 사실 이들이 영화 속에서 꿈꾸는 욕망은 한국 영화의 선배들과 비교해도 소박한 편이다. '네온 속으로 노을 지다'(1995년)처럼 전문직으로 성공을 꿈꾸기는커녕, 연애와 결혼을 동시에 거머쥐려는 야심('결혼은 미칫 짓이다'.2002년)도, 미혼모로 혼자 서려는 당당한 도전('싱글즈'.2003년)도 아니다. 이들은 그저 자신도 제대로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올미다'를 만든 청년필름의 심현우 실장은 "서른을 넘건, 할머니가 되건 여성으로서 여전히 희망과 욕망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면서 "가장 평범한 여성이 사랑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 얘기"라고 말한다.

'올드 미스 다이어리'

# 원작은 인기, 영화는 틈새=알려진 대로 '미녀'는 일본 만화가, '올미다'는 국산 시트콤이 각각 원작이다. 원작의 확인된 인기와 달리 이들 영화는 저마다 큰 고심을 거쳤다. '미녀'의 노은희 프로듀서는 "가벼운 트렌디 로맨스물에서 포복절도형 코미디까지 각기 다른 시나리오 버전만도 15개였다"고 전한다. 주인공 한나를 가수로 설정한 것은 에피소드 위주의 원작 만화에는 없던 부분이다. '오 브라더스'를 만든 김용화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내놓은 아이디어다. 덕분에 완성된 영화는 김아중이 '마리아'를 열창하는 콘서트 장면이 큰 볼거리와 극적인 절정이 된다.

'올미다'역시 TV시트콤의 등장인물과 배역은 고스란히 옮겨오되 애초 세 명이었던 미혼여성을 미자로 압축하는 변환을 거쳤다.

따로 원작은 없어도 '언니'의 시간여행은 할리우드 영화'백 투 더 퓨처'나 일본 만화 '18어게인'에서 보듯 아주 익숙한 장치다. 이를 '언니'는 정주가 돌아간 94년과 현재를 대비하면서 코미디로 활용한다. 정주가 미래의 박지성인 줄 모르고 평발 소년을 격려하는 에피소드가 한 예다.

제작 단계에서는 흥행도 낙관하기 힘들었다. 노은희 프로듀서는 "20대 여성은 문화소비가 가장 활발한 계층이지만, 정작 이들을 겨냥한 것은 상업적 약점이라는 지적이 많았다"고 전한다. 이른바'대박'이 되기에는 가족 관객을 불러모으는 데 한계가 있다는 시각이다. 실제로 '올미다'의 개봉 첫 주 스크린 수는 '미녀'(450여 개)의 절반에 못미치는 180개였다. '중천' '박물관이 살아있다' 등의 대작들과 같은 주에 개봉하면서 스크린 확보 경쟁에서 밀렸기 때문이다. 자연히 한 주 앞서 개봉한 '미녀'의 흥행을 틈새 시장의 성공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흥행성적을 떠나서도, 최근 충무로에서 보기 드물었던 소재로 관객의 마음의 틈새를 제대로 파고든 이들 영화의 성과는 주목할 만하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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