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한 '솔 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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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솔(soul)음악의 대부' 제임스 브라운(사진)이 25일(현지시간) 73세의 나이로 타계했다는 소식에 흑인 음악계는 큰 비탄에 빠졌을 것이다.

그의 죽음은 한 자연인이나 가수의 죽음이 아니라, 흑인음악 전체가 아쉬워할 만한 큰 손실이다. 사람들은 그를 엘비스 프레슬리, 봅 딜런 등과 함께 과거 50년간 대중음악계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로 선정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는다.

마치 용암이 분출하듯 폭발하는 가창이야말로 제임스 브라운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는 소름 끼치는 절창으로 '솔의 대부'라는 영예로운 수식을 얻으며 1960년대 미국 흑인사회를 장악했다. 미국 흑인의 몸과 정신이 무엇인지 그 정체성을 알려면 먼저 제임스 브라운을 찾으라는 말은 허튼소리가 아니다.

그의 영향력은 일개 가수 차원을 넘어 사회 지도자의 위상에 버금갔다. 소외받은 모든 흑인들은 그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했다. '내가 흑인이고, 자랑스럽다는 것을 크게 소리 지르라(Say it loud I am black and I am proud)'는 66년 히트곡 이름처럼, 그로 인해 흑인들은 백인사회의 억압에서 벗어나 자긍심을 표출할 수 있었다. 흑인 폭동 때는 그의 한 마디에 시위군중이 해산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흑인 정신의 고취 못지 않게 음악이 '몸의 예술'임을 증명했다. 노래를 잘했을 뿐 아니라 춤도 잘 췄다. 너무나도 유연한 발놀림과 몸 회전, 커다란 동선을 선보이며 모든 사람을 춤추게 했다. 그가 없었다면 마이클 잭슨이나 어셔도 없었을 것이다.

그의 노래들은 믹 재거, 데이비드 보위, 프린스 등 많은 후배 가수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었다. 지금도 많은 랩 가수들이 '샘플링' 기법으로 그의 음악을 활용하고 있다. 그래미상도 세 번이나 받았다. 최우수 R&B 음반 부문(1965년), 최우수 R&B 남자보컬 부문(1987년), 평생공로상(1992년) 등이다. 그는 또 1986년 엘비스 프레슬리, 척 베리 등과 함께 로큰롤 명예의 전당 첫 헌액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목청 높여 외치고, 몸을 맘껏 흔드는 것이 소외 계층의 자유라는 사실을 제임스 브라운을 통해 배웠다. 음악 역사도 그를 솔은 물론, 그 뒤를 이은 춤의 장르인 펑크(funk)의 선구자로 융숭하게 대접한다. 빌보드 차트에서는 '톱 40' 히트곡을 역사상 가장 많이 보유한 대기록의 주인공이다. 그의 노래인 '남자, 남자, 남자의 세계' '굿바이 마이 러브' '리빙 인 아메리카' 등은 국내에서도 널리 사랑받았다.

임진모<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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