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도 정신도 썩고 있다/김주영(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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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가령 이런 모습들을 상상해보자. 도살한 소에다 물 먹여 팔기를 일삼아온 식육업자,수서사건에서 뇌물을 건네주었거나 받아 착복한 기업인과 정치인,상수원에 공장폐수를 상습적으로 흘려보낸 공장책임자,그러한 반사회적 범죄를 묵인했거나 방조해온 공무원들이 텔리비전 화면속으로 바라다보인다.
프로그램의 사회자는 소에다 물먹여 팔아온 식육업자에겐 곤충의 애벌레가 득시글거리는 웅덩이의 물을,뇌물과 관련된 기업인과 정치인에겐 때묻은 지폐 다발을,상수원에 공장폐수를 그대로 흘려보낸 장본인에겐 자신의 공장에서 발생된 최초의 폐수를,그리고 직무유기를 일삼아온 공무원에겐 엿을 먹이는 장면이 수상기 화면속에서 여과없이 실연되었다 하자. 그때 나타날 사회의 반응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그것은 법의 존재조차 무시당하는 독재국가에서도 벌어질 수 없는 언론수단의 말기적 병리현상에 대해 우리 사회는 분노하고 절망할 것이다.
○원시적 보복충동 느껴
그러나 사건이 발생하게된 원인규명과 해결책의 제시도 없이,또한 그들을 응징할 법의 존재가 엄연한데도 불구하고 그런 유아기적 보복수단을 구사한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한 방송국 제작진의 상식이하의 의식수준과 횡포에 대해 사회는 분노와 비감을 느끼게될 것이고,결국 그 방송사는 문을 닫게될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있다. 결과야 어떻게되든 그런 상식이하의 장면을 한번 보고 싶다는 충동은 요사이 이르러 하루에 몇번씩 가슴을 방망이질 한다.
그러한 발상자체부터가 얼마나 유치한가. 유치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런 충동을 느낀다는 것을 감히 발설하고 싶다.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비감에 젖게 만드는 것은 독극물에 다름아닌 공장의 폐수를 그대로 시냇물에 흘려보내고 있는 당사자들과 혹은 관련자 대다수들도 역시 우리와 같이 똑같은 물을 마시고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부터다. 그러한 사실이 두렵고 무섭다. 발암물질이 섞인 폐수를 시냇물로 흘려보내고 있는 당사자 역시 가정으로 돌아가 그 물을 예사롭게 마시고 있다면,그것은 바로 자신의 비수로 스스로의 가슴을 눌러 찌르는 자해행위가 아닌가.
설령 이번에 범죄행위가 적발되어 사회를 분노로 뒤덮이게한 두산전자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일에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고 있는 또다른 기업체 사람들의 모든 가정에 완벽한 정수시설이 갖춰져 있다고 볼 수는 없다.
이 사회는 그 스스로의 자해행위조차 멋있고 우아하게 살아가는 생활행위처럼 여기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자신을 적으로 삼아버린 병리현상 속에도 역력하게 도사리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어째서 그 무서운 짓을 예사롭게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제가슴에 비수 꽂는 격
이유는 간단하다. 떵떵거리며,또는 건강하고 우아하게,그리고 좀더 오래도록 잘 살아보자는 목표가 거기에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수단에 의존되어 있는 삶의 모습이라면,꼼꼼하게 따져볼 것도 없이 결코 잘사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분명히 스스로를 적으로 삼은 자해행위를 연출하고 있으면서도,잘 살거나 혹은 잘 살아져가고 있다고 믿는 착각의 함정은 치유가 불가능할 것만 같은 병리징후가 또한 뚜렷하다.
그 병징들은 이제 고삐풀린 맹수처럼 걷잡을 수 없는 맹렬한 힘으로 우리들 삶의 표피들을 훼손시키면서 잠식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냥 허둥지둥 냅뜨지 말고 이 시점에 이르러 좀 진중해져야 하지 않을까. 너나없이 조금씩 못산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조금은 못살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서도 얼마든지 멋이 있고 만족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살필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가슴에 꽂은 비수를 그 스스로의 손으로 더욱 깊이 찔러넣기 위해,텅빈 사무실 어두운 구석자리에 혼자남아 밤을 지새우며 비밀폐수로를 설계하고,또한 정화시설에 대한 거짓보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허우대 멀쩡한 젊은이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얼마나 가증스럽고 얼마나 슬픈 모습인가. 재벌이 무엇이며,돈이 무엇이며,몇 닢의 뇌물이 결코 무엇이길래,우리의 사회와 기업은 그 능력과 총명을 인정받고 있는 젊은이들을 불러다가 이런 일을 두려운줄 모르고 벌일 수 있도록 은밀한 언어로 부추기고 있는 것일까.
○참혹한 반문명의 시대
그로 인해 강물이 썩어가고 있듯 그 정신과 육체가 또한 썩어가고 있다는 것을 총명한 사람들 스스로는 어째서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몇해전 어떤 일간신문에 실려있던 한장의 낡은 사진이 눈앞에 떠오른다. 한말 서울 변두리동네의 빨래터 풍경을 컬러필름으로 찍은 것이었다. 잔허리와 젖무덤이 그대로 드러난 남루한 행색의 아낙네가 개울가에 엎드려 빨래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곁에는 아낙네의 소생인듯한 발가벗은 아이가 멱을 감고 있었다. 그런데 아낙네가 빨래를 헹궈내고 있는 그 개울물은 바로 쪽빛이었다.
제 분수를 모르고 허둥대는 사람을 한마디로 면박줄때 쓰이는 속언에 냉수먹고 정신차리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제 우리에겐 면박을 당하고도 정신차리기 위해 마실 한 사발의 냉수가 없다. 우리는 어느덧 참혹한 반문명의 시대를 살고 있다.<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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