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건의 반격 "노 대통령 고립은 무능력의 결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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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 전 총리가 22일 서울 종로 사무실을 찾은 기자들에게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관련한 입장을 밝힌 뒤 사무실을 나서고 있다. 최승식 기자

22일 고건 전 국무총리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고건 총리 기용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인사"였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전날 발언에 대해 불쾌한 빛이 역력했다. 처음 발언을 접했던 21일 밤 고 전 총리는 "직접 국민에게 설명하겠다"며 격앙했었다고 한다. "신중하고 느긋한 평소 스타일과는 다른 모습이었다"는 게 참모들의 전언이다. 보좌진이 말리는 바람에 이날은 맞대응을 자제했지만 고 전 총리는 거의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22일 아침 직접 성명서를 썼다. 이 때문에 하루도 빼놓지 않던 집 부근 대중탕에서의 아침 요가운동도 걸렀다.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성명서에서 그는 "노 대통령의 발언은 한마디로 자가당착이며 자기 부정"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국민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외면하고, 오만과 독선에 빠져 국정을 전단(專斷)한 당연한 결과"라고 반박했다. "노 대통령이 스스로 인정하는 '고립'은 국민을 적과 아군으로 구분하는 편 가르기, 21세기 국가 비전과 전략은커녕 민생 문제도 챙기지 못하는 무능력, '나눔의 정치'가 아니라 '나누기 정치'로 일관한 정치력 부재의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라고도 했다.

고 전 총리는 평소보다 늦은 오전 11시쯤 개인 서재로 쓰고 있는 서울 연지동 사무실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과 마주쳤다. 그는 사무실 벽에 걸린 자신의 호 '又民(우민.다시 백성이란 뜻)'을 가리켰다. 그러면서 "공직에 일곱 번 출입하면서 필요하면 일하고 (역할을 다했다고 판단할 때) 나왔다. 정부에 들어가더라도 다시 나와 다시 백성이 된다는 의미로 쓴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소감은.

"국가 지도자로서의 언행은 정제되고 믿음이 있어야 한다. 총리 때 여당 의석이 46석인 여소야대였다. 4당 정책위의장과 원내대표가 참여한 국정협의회를 매주 한 번씩 열 번 이상 했다. 국가 현안과 정책, 입법 과정을 정치적 조율을 통해 빠짐없이 원만하게 처리했다."

-대통령 발언이 서운하지 않나.

(즉답을 피한 채)"헌정 사상 초유의 탄핵 소추 상황에서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그 평가는 국민의 몫이지 개인의 몫이 아니다."

-성명서 내용이 강경한데.

"평소에 하던 얘기다. 지금 상황에 맞는 것만 모은 것이다."

-대통령이 왜 그런 발언을 했다고 보나.

"제가 오히려 여쭤보고 싶다."

-국민은 어떻게 생각할까.

"앞서 말한 것과 같지 않을까?"

-청와대에서 이후 해명성 연락이 있었나.

"모르겠다."

고 전 총리의 반격에 대해 한 측근은 "고 전 총리가 오랜 공직생활에서 터득한 나름의 '감'이 작동한 것 같다. 직감적으로 지금이 (노 대통령과 결별할) 타이밍이라고 보고 있다"고 전했다. 내부적으론 대통령의 발언을 "고 전 총리를 겨냥해 여권 내 통합신당파의 입지를 위축시킴으로써 차기 대선에서의 영향력을 높이고 자신의 대선 구상을 실현하려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자칫 잘못하다가는 고 전 총리의 이미지와 대선 가도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실패한 인사'라는 말 속엔 무능하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다. '고 전 총리=무능'으로 인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반격의 강도를 높이지 않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다.

총리 재직 때 노 대통령과 심리적 갈등을 겪으면서 쌓인 감정의 앙금도 강경한 성명의 배경이 됐다는 후문이다. 고 전 총리도 성명에서 "참여정부 초대 총리직을 제의받았을 때 많이 망설였고, 또 고뇌했다. 그러나 안정 속의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많은 사람의 권유와 종용에 따라 이를 수락했다"고 적었다. 주변에선 "권한대행 66일 동안 고 전 총리가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노 대통령 측근들이 고 전 총리가 대통령 행사를 하려는 것 아닌가 하고 그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한 참모는 "대통령이 온갖 정략적 접근으로 대선정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할 테지만 한 자릿수 지지율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라며 "노 대통령이 그렇게 나올수록 오히려 노 대통령과 결별해 통합신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신당파의 입지가 탄력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 "고건 전 총리 자체를 비판한 것 아니다"=청와대 윤태영 대변인은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는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고 전 총리의 인품이나 역량, 당시 정책에 대해 평가한 것은 일절 없다"고 해명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사진=최승식 기자 <choissi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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