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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 김석환특파원 현지취재/흔들리는 소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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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방 추리·공상소설 “불티”/체제에 염증 국내작품은 외면/분리파공선 TV시청도 안해
지난 8일 오후 2시.
모스크바시 중심가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철역 「파르크 이 쿨트라」에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긴줄을 지으며 늘어서 있었다.
최근 각종 물자난이 가중되고 있는 모스크바에서 줄서는 모습은 흔히 생필품이나 코피·담배 등 기호품을 위한 것이었으나 이날의 줄은 책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
파르크 이 쿨트라역 바로 옆에 위치한 서점 프로그레스로 향한 이 줄은 이 서점 2층에서 판매중인 노영사전과 영국사학가 E H 카의 러시아혁명사 노어판을 구입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서점 바로 앞에서는 한 청년이 최근 소련에서 가장 인기가 있으면서 일반 상점에선 구할 수 없는 영국 애거사 크리스티의 각종 추리소설 노어판을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근 소련에선 추리소설붐과 함께 영어등 외국어학습붐이 일고 있어 이 분야의 관련서적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어렵게 애거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손에 넣은 올랴양(19)은 『15루블을 주었지만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게돼 기쁘다』고 했다.
대부분 외국회사와 제휴한 출판사들이 출간하고 있는 외국추리소설은 최근 소련에서 상당한 히트를 기록하고 있다.
이에 따라 애거사 크리스티외에도 에드 맥베인,렉스 스타우트,레이먼드 챈들러 등 미국의 추리 및 범죄소설 작가들이 현대작가 막시모프,제정러시아시대의 도스토예프스키,러시아혁명기의 고리키 등을 누르고 가장 인기있는 작가의 자리에 올랐다.
또한 사회가 혼란하고 서방사회에 대한 동경심이 크게 일면서 소련의 독자들은 섹스물·과학소설·예언서 등과 같은 장르를 선호하고 그것도 똑같은 내용이라도 외국의어 작가들이 쓴 것에 더 큰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따라 주로 각종 선전물과 딱딱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서들을 출간하던 노보스티통신사의 출판국·프로그레스 출판사 등 국영출판사들도 외국작가들과 계약하거나 외국출판사와의 합작을 통해 노어판을 발행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
노보스티통신사는 영국작가 마틴 크루즈의 『섹스의 즐거움』을 비롯해 미국의 톰 클랜시의 소설을 출간할 계획이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등을 수록한 『내마음을 말한다』의 출판을 위해 계약을 끝마쳤다.
소련최대의 전문서적 출판사인 프로그레스사도 세태에 밀려 데일 카네기의 『어떻게 친구를 얻고 상대방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를 비롯해 몇권의 서방작가 작품을 준비중이다.
여기다 최근들어 전문연구가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소련이 자랑해온 소베츠카야 백과사전 대신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의 노어판 발행을 위한 교섭을 진행중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현상은 출판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화와 음악 등 다른 예술분야도 마찬가지다.
지난 1일 에스토니아공화국 탈린에서 만났던 필락 안트(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회원)는 『소련의 문화계가 새로운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가운데 구체제에 염증과 실망을 느낀 일반인들이 소련문화에 대한 대항현상으로서 외국것을 선호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현상은 분리파 운동을 벌이고 있는 지방공화국에서 훨씬 심각하다.
이들 공화국에선 자민족언어로 된 작품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한편 소련것은 아예 쳐다도 보지않으려는 반소비예트 문화운동단체들도 나타나고 있다.
이들 공화국에선 소연방 전체를 대상으로 러시아어로 방송되는 TV 1번채널은 시청률이 지극히 저조하고 그 공백을 외국의 방송들을 녹화해 송출하는 지방공화국 자체 프로그램들로 메우고 있다.
모스필름·렌필름 등에서 만든 극히 예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는 인기를 끄는 영화는 거의 전부가 서방의 것들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트리비미 벨리스테(에스토니아공 문화자치그룹 총재)는 『러시아 것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토니아공화국에 존재하는 문화의 독자성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러시아어를 알면서도 러시아어를 사용하지 않고 러시아어로 표기된 도로명등을 하얀 페인트로 지워버리고 그 위에 에스토니아어등 자체민족어로 표기하는 장면들이 종종 목격되는 가운데 소련의 문화계가 당면한 이와 같은 현실은 흔들리는 소련의 또다른 일면이라고 할 수 있다.<모스크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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