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핵 보유국' 내세워 몸값 부풀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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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개월 만에 마련된 베이징(北京) 6자회담 테이블이 북한의 핵 폐기 거부로 첫날부터 삐걱거렸다. 지난해 9.19 공동성명에서 "공화국(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계획을 포기할 것을 공약했다"고 제1항에 서명해 놓고도 이번에 '조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며 뒤집어 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핵 폐기를 위한 구체적인 북한의 이행조치와 이에 상응하는 보상방안을 논의하려던 한국과 미국.일본.중국.러시아 등 참가국의 구상은 북한의 태도변화가 없는 한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 조건 성숙 뭘 의미하나=우리 정부 당국자에 따르면 북한 김계관 외무성 부상은 18일 기조연설에서 "조건이 성숙되지 않은 현단계에서 핵무기 문제를 논의코자 할 경우 핵 군축회담의 진행을 요구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핵 군축회담은 북한을 핵 보유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참가국들로선 받아들일 수 없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북한이 핵 군축회담을 거론한 것은 사실상 참가국들의 핵 폐기 요구를 차단하려는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김 부상은 또 미국의 금융제재와 유엔제재 등 대북제재가 해제돼야 9.19성명 이행방안의 논의를 개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회담과 병행해 별도로 북.미 간에 열리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의 북한 계좌 해제 문제의 논의 결과를 지켜보면서 본회담 협의에 응하겠다는 의도다. 특히 10월 북한의 핵실험 강행으로 이뤄진 유엔의 대북제재 제1718호를 푸는 것도 전제조건으로 달았다.

북한이 핵 프로그램 포기 논의를 위해 제시한 조건은 더 까다롭다. 미국의 대북 적대적 법률.제도장치의 철폐와 유엔 제재 등 북한에 대한 모든 제재의 해제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9.19성명에 담긴 경수로 제공과 에너지 지원도 요구했다. 한마디로 9.19 성명에 담긴 모든 대북 보상책을 이행해야 핵 포기 논의를 시작할 수 있다는 얘기다.

◆ 핵 군축회담 걸림돌 될까=북한의 핵 군축 회담 주장은 핵실험 직후부터 가능성이 제기돼 왔다.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각오하고 핵실험을 강행한 북한이 이를 협상카드화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북한이 핵 군축 회담을 내세운 것은 '핵보유국' 지위 주장을 통해 몸값을 올려 보상을 극대화하려는 의도라는 게 정부 설명이다. 당국자는 "회담 초반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최대한의 쇼핑리스트를 상대방에게 던져놓고 핵 폐기를 원한다면 보상을 달라고 압박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9.19 공동성명을 논의의 출발선으로 삼을 것이란 예상을 벗어난 북한의 과도한 요구에 당혹해하는 분위기도 정부 내에서 감지된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측 수석대표도 기조연설에서 '인내의 한계'를 언급했다. 미국과의 양자회담을 주장해 온 북한은 18일 북.미접촉을 거부하는 등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영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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