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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지공을 배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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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우리에겐 중국에 대한 오랜 선입견이 하나 있다. '만만디(慢慢的.천천히)'다. 요즘엔 중국이 '콰이뎬얼(快點兒.좀 더 빨리)'을 외친다는 견해도 있다. 중국인과 자주 교류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어떤 이는 두 가지를 뭉뚱그리기도 한다. 자기에게 불리할 때는 만만디로, 유리할 때는 콰이뎬얼로 간다고 말한다. 모두 일리 있는 얘기다.

그래도 어느 쪽이 중국인의 기질에 더 근접한 설명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중요한 문제에 관한 한'이란 전제를 단다면, 대답은 단연 '만만디' 쪽이다. 그리고 이 '만만디'에 중국의 경쟁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중국 지도부가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은 '만만디'의 전형이다. 상하이방(上海幇)의 거두 천량위(陳良宇) 전 상하이 당 서기 겸 정치국원의 실각 스토리를 되새겨보면 마치 영화 한 편을 슬로비디오로 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천의 보스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이다. 올해 8월 17일은 장의 80세 생일이다. 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은 각별한 선물을 준비했다. 장쩌민 집권 시대의 담화, 회의 내용 등을 묶은 '장쩌민 문선'을 간행하고, 전 중앙당 간부가 모인 가운데 '장쩌민 문선 학습대회'를 가졌다. 8월 3일 저녁에는 중난하이(中南海:자금성 옆에 위치한 중국 최고지도자들의 집단 거주지) 내 장쩌민 숙소에서 성대한 만찬도 베풀었다. 이 만찬에는 중국의 최고권력자인 정치국 상무위원 9인이 모두 참석했다. 대단한 예우다.

그러나 이때 중앙당 기율검사위원회(중기위)는 벌써 천에 대한 내사를 이미 끝낸 상태였다. 전임자를 극진하게 모시면서, 다른 한편으론 그의 심복을 가차없이 제거하는 작업이 동시에 진행된 것이다. 중국 정치의 냉혹함이고, 이 냉혹함을 주도한 것은 '만만디'였다.

천에 대한 내사는 5월부터 시작됐다. 상하이시 사회보장기금 수십억 위안을 유용했으며, 10억 위안의 부정대출을 지시하고, 사생활이 문란하다는 점이 확인됐다. 그래도 중기위는 서두르지 않았다.

7월 푸시(福禧) 투자기금의 장룽쿤(張榮坤) 회장을 은밀하게 잡아들였다. 주변에는 출장이라고 소문 냈다. 장 회장은 천의 측근 관리들에게 정기적으로 뇌물을 상납하며 그 대가로 불법대출을 챙긴 인물이다. 장 회장 조사를 통해 중기위는 천의 측근 관리들이 장 회장이 마련한 호텔 방에서 장 회장이 조달한 여성 연예인들과 환락 파티를 여는 비디오 필름을 확보했다.

마침내 9월 중순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전원 합의'의 형식으로 천의 해임과 수사를 결정했다. D데이는 9월 23일로 정해졌다. 이날 저녁 7시 천은 상하이 국제육상경기 개막식에 참석한 뒤 밤 11시부터 측근들과 호텔에서 술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이때 돌연 천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치국 긴급회의에 즉시 참석하라는 통보였다. 천과 한정(韓正) 상하이 시장은 특별기 편으로 베이징으로 날아왔다. 정치국원이 아닌 한 시장에겐 참관인 자격으로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새벽 1시 중난하이의 정치국 심야회의장. 개회 즉시 우관정(吳官正) 중기위 서기가 일어나 "중앙의 결정을 낭독한다. 천량위 동지의 상하이시 서기 겸 정치국원 직을 면직한다"고 발표했다. 설명도 절차도 없었다. 오랫동안 만만디로 뜸을 들인 대신 행동은 번개같았다. 천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안가로 연행됐다.

중국은 매사 이런 식이다. 북핵 문제이건, 역사 문제이건, 영토 문제이건, 무역 분쟁이건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 철저한 지공(遲功:서두르지 않음)이 중국의 변치 않는 전략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지론인 도광양회(韜光養晦:밝음을 감추고 어둠을 키운다, 즉 재주를 감추고 시기를 기다린다)는 지공의 상징적 구호 아닌가. 긴 호흡으로 중국을 상대해야 낭패를 면할 수 있는 이유다.

진세근 베이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