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하무인 차지철(청와대비서실:1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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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사설정보팀 두고 2인자 행세/중정 김재규와 마찰 대통령 직접보고/매주 열병식 열어 요인들 초청 기죽여
73년 3월 윤필용사건과 그해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겪으면서 윤필용 수경사령관·강창성 보안사령관·이후락 정보부장 등 2인자그룹을 차례로 정비한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통치를 더욱 강화해나갔다.
74년 1월부터 유신에 대한 학원의 저항을 봉쇄하는 긴급조치가 잇따랐다. 박대통령은 시끄러운 국내정치를 잠재우고 안보와 경제발전이라는 국가목표에 전념하겠다는 소신을 굳힌 만큼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단호했다. 절대권력자의 통치방향이 이렇게 확립됨에 따라 권력주변의 분위기도 확연히 달라져갔다. 이른바 「예스맨」들의 정부내 포진이 눈에 띄게 늘어갔다. 그러나 호사는 다마라든가. 탄탄대로의 기반에 뜻하지 않은 일이 터졌다. 북한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테러리스트 문세광이 육영수여사를 저격한 것이다.
대통령 이전에 한 남자로서 박대통령이 겪어야했던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사랑하는 아내이자 청와대내 「야당의 목소리」였던 육여사를 잃은 박대통령은 내부로부터 서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내가 총탄에 쓰러지는 순간을 목격하고도 8·15 경축사의 남은 부분을 다 읽고 병원에 찾아갈 정도로 강인함을 보여주었던 박대통령이었지만 그도 인간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권력암투 불씨로
그는 우선 대일 외교마찰로 비화된 문세광사건을 다나카 총리의 육여사장례식 참석,시나특사의 사과방문으로 마무리지었다.
그런다음 박대통령은 아내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을 외견상으로는 국가안보에 대한 종교와도 같은 신념과 경제발전에 쏟기 시작했다.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 육성에 더욱 많은 시간과 땀을 쏟아 부었다. 일단 「유신」으로 평정한(?) 국내정치는 그의 관심영역에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야당과 재야·학생들이 유신을 장기·독재정권의 강화라고 반발했으나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당시 박대통령의 심경을 큰 딸 박근혜씨는 최근 「청와대비서실」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전했다.
『인권을 침해받아 고통당한 분들께는 딸로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버님이 장기집권만을 위해 그러셨다는 비난은 억울합니다. 아버님은 저희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월남이 공산당에먹혔는데 북한은 베트콩보다 더 무서운 존재야. 나라가 위기인데 다른 문제로 비판을 받더라도 지도자는 나라부터 구해놓고 봐야지. 경제발전과 자주국방만 해놓으면 다른 사람이 말려도 내가 알아서 물러갈텐데 왜 사람들이 기다려주지 않는지…」라고요.』
그러나 박대통령의 시선이 경제와 안보에 지나치게 경사되어 머무르고 있을때 권부내에는 국내정치권력을 놓고 또다른 암투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
74년 8월 박종규 경호실장 후임으로 청와대에 들어온 차지철 경호실장과 이후락·신직수씨에 이어 77년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간의 불화와 세력다툼이 바로 그것이었다. 두 사람간의 반목과 대결은 끝내 10·26 궁정동 만찬으로 역사적인 종막을 고하고 말지만 거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은 실로 권력의 야누스적 면모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한마디로 좋게 보면 우직하고,나쁘게 보면 무능했던 김재규와 푼수에 넘는 정치적 야심을 갖고 야심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차지철간에 벌어진 한판 승부였으며 이렇게 문제있는 사람들을 권력핵심에 앉힌 박대통령의 자업자득이기도 했다. 박대통령은 이미 초기의 탁월한 용인술과는 거리가 먼 인사를 한 것이다. 과잉충성으로 자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간신배적 행태와 「예스맨」의 풍조가 청와대 주변의 분위기를 조성해가고 있었다.
바로 이같은 비정상적 분위기를 주도하고 박대통령의 「총기」를 흐리게한 사람이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차실장은 이규광씨(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를 팀장으로 사설정보팀을 운영해 중정과는 별도의 정보보고를 박대통령에게 올리고 김부장을 제쳐놓고 야당공작을 도맡아하는가 하면 공화당을 조종하는 등 2인자 실세로서의 야심과 위세를 키워나갔다.
차실장의 세력과시는 여러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는데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매주 금요일 있었던 「국기강하식」이란 이름의 경호부대 사열이었다.
차실장은 75년부터 경호실요원·청와대경비를 담당하는 수경사 30·33경비단,공수단,경찰(101경비단) 등을 매주 금요일 경복궁내 30경비단 연병장에 집합시켜 열병·분열을 받았다. 그가 이 행사를 시작한 것은 각하의 목숨을 지키는 경호부대의 단결과 사기를 높이고 정신무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취지에서였다.
○간부후보생 출신
그러나 차실장은 78년께부터 사열식에 권위를 부여한다며 외부의 유력인사들을 불러 로열박스에 세워놓고 자신의 위력과시와 상대방 「기죽이기」를 시작했다.
그무렵 이미 차실장 눈치를 보기에 급급했던 공화당·내각의 인사들은 감히 참석권유를 뿌리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일부 「아부족」들은 초청을 받지못해 안달을 부렸다.
차실장의 끈질긴 참석권유를 뿌리쳤던 몇 안되는 사람중 하나인 김정렴 당시 비서실장의 증언.
『78년 초인가,하루는 차실장이 내 방에 찾아와 불쑥 이런 말을 꺼내는 거예요. 「각하경호를 책임지는 경호부대원들의 정신무장을 위해 1주일에 한번씩 열병·분열을 하고 있는데 이제부터는 당·내각·비서실분들도 열병식에 모셔 보여드리기로 했습니다. 맨 먼저 비서실장님을 모시기로 했으니 참석해주십시오」라고요.
속으로 참 어이가 없더군요. 각하경호를 빈틈없이 하기 위해 경호실이 군과 착착 손발이 맞아야하는 것은 좋지만 대통령도 아닌 민간인인 경호실장이 왜 군병력을 사열합니까. 군대에서 그런 법은 없는 것이거든요. 더군다나 경호실장이 군을 장악한다는 이미지를 주거나 그런 마음을 먹으면 시끄러워집니다.
당연히 차실장의 의도가 의심스러워지더라구요. 그렇다고 해서 그와 사이좋게 지내야할 비서실장 입장에서 노골적으로 「그러면 되겠느냐,그런 행사는 곤란하다」고 하기도 어려웠지요. 그래서 「각하가 언제 비서실장을 급히 찾으실지 모르는 것 아니냐,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 둘다 정위치를 떠나 하기식에 있다 긴급사태라도 생기면 어떡하느냐」는 이유를 둘러대 거절했지요. 차실장은 그후 세번이나 전화를 걸어 꼭 좀 참석해달라고 졸랐지만 나는 그때마다 적당히 피하고 끝내 한번도 참석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시작된 국기강하식이 얼마나 유명한 행사가 되어버렸는지…. 비서실·당·내각 등에서 이렇다할 사람치고 가지않은 사람이 없어요. 나라도 안가고 버텨야된다는 신념이 생기더군요.』
차실장은 국기강하식에서 국군의 날 여의도에서 높은 연단에 우뚝서 육·해·공 정예국군의 힘찬 대오를 한눈에 굽어보던 박대통령 흉내를 냈다. 행사장 위치나 식순에 박대통령 대신 자기를 끼워넣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실장의 2인자 시대를 지켜본 부하중 한사람인 Q씨는 당시의 행사장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박 대통령 “흉내”
『국군의 날 행사를 축소해서 했다고 보면 돼요. 차실장이 사열관 자격으로 로열박스 맨앞에 서고 좌우로 초청된 거물급 당간부·부총리를 비롯한 장관들이 백묵으로 표시된 자리에 섰어요. 초대손님은 차실장이 직접 골랐지요. 그때 요직에 있는 사람치고 차실장이 「우리 경호실행사를 한번 보여드리고 싶습니다」고 하는데 감히 누가 뿌리칠 수 있었겠습니까.
김재규 정보부장도 군말않고 왔을 정도였으니까요.
사열관과 내빈들이 로열박스에 자리를 잡으면 군악대 팡파르와 함께 사열식이 시작됐죠. 건장하고 늘씬한 경호실요원,군정예부대중의 하나인 수경사 30·33경비단,공수단,경찰 등 청와대경호부대가 바둑판처럼 도열해 경복궁 연병장을 메웠는데 근사했지요. 경호부대 화력을 상징하는 병기도 그 옆에 정렬됐구요.
제병지휘관은 준장이었던 경호실 작전차장보가 맡았어요. 차실장밑에서 차장보자리를 차례로 맡았던 이광로·전두환·노태우·김복동씨 등이 우렁찬 호령으로 부대를 지휘했습니다.
사열관을 향해 「받들어 총」하면 차실장은 잔뜩 멋을 부려 경례로 답했고 제병지휘관과 함께 지프를 타고 열병했지요. 열병이 끝나면 분열인데 전두환 준장이 칼을 찬채 특유의 당당한 몸짓으로 선두에 서서 행진하면서 사열대 앞에서 칼을 빼 높이 치켜들고 「우로 봐」 구호를 하는 거예요.
군으로야 차실장이 2년정도 선배이고 직속상관이니 겉으로는 차장보인 전준장이 차실장을 깍듯이 대접할 수 밖에 없었지만 내심 미묘한 감정이 있었을 거예요. 전준장은 4년제 정규육사 11기 출신이라는 프라이드가 대단한데다 공수단 대위시절 어쨌거나 같은 대위였던 차실장과 미 레인저유격훈련을 받은 동기였거든요.
그래서인지 전준장은 장군인 자기가 사병들하고 같이 행진하면서 「우로 봐」하는 것이 모양이 별로 안좋다고 생각했어요. 나중에 전준장은 차실장에게 『국군의 날 여의도행사처럼 제병지휘관이 지프를 타고 앉아 분열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건의해 분열방식을 바꾸어놓기도 했지요.
식이 오전에 끝나면 차실장은 정치인·장관들을 경호실 2층에 특별히 마련해 놓은 실장전용 식당으로 모셔 점심대접을 합니다.
식이 오후에 있을때는 행사에 참가한 초청인사들을 경회루로 모셔 칵테일파티를 벌이곤 했어요.
차실장은 이 국기강하식행사를 굉장히 즐겼습니다.
스틸 웰 미 8군사령관이 한국근무를 마치고 이임할때도 경복궁으로 불러 사열식을 해주었습니다. 식이 끝난후 경호실장방에서 「경호실장 증정」이라고 새긴 지휘도(사베르·칼)를 주었어요. 스틸 웰장군도 검을 받은후 거수경례로 답했고요.』
유명했던 국기강하식은 경호실을 막강 권부로 키우려고 했던 차실장의 야심이 농축된 의식이었다.
박종규 실장으로부터 경호실을 인수받자마자 차실장은 주로 육사출신의 육군소장·준장을 차장과 차장보에 보임해 밑에 두고 근무를 마치고 나갈땐 중장·소장으로 진급시켜주는 혜택을 주었다.
차장으로는 정병주(육사 9기·10·26때 특전사령관)·문홍구(육사 9기·전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전성각(육사 8기)·이재전(육사 8기·전 성업공사 사장) 소장 등이 기용됐다.
또 행정·작전차장보로는 이광로(현 민자당 전국구의원)·전두환·노태우·김복동 준장이 차례로 발탁됐다.
차실장은 이들을 경호실 간부로 데려오면서 『8·15 저격사건 같은 북한의 테러로부터 국가원수를 보호하기 위해선 경호실을 강화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군장성급이 경호실에 들어와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차실장의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명분외에도 비육사공수단 출신으로서 정규 육사출신들에게 가지고 있던 열등감을 이런식으로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숨어있었던 것 같다.
○초청 못받아 안달
오랜기간 경호실에 근무했던 L씨의 증언.
『가뜩이나 자신의 비천한 출생비밀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차실장은 정규육사를 나오지 못한데 대해 한을 갖고 있었죠. 차실장은 용산고 5년생때 6·25가 터져 학도병으로 군에 들어갔는데 51년 정규육사 1기시험에 낙방했죠.
그래서 간부후보생으로 소위를 달았고 중위때 새로 창설된 공수부대 요원으로 들어갔지요. 그때 육사 11기 출신으로 자원해온 전두환 중위를 처음 만난거죠.
이후 5·16이 터져 차대위는 최고회의 경호팀에서,전두환·손영길·최성택 대위 등 육사 11기는 비서실에서 근무했는데 그때도 차대위는 정규 육사출신들에게 별로 기분이 좋지않았다는 거예요. 비육사인 박종규 경호대장이 육사 8기생하고 티격태격한 것과 비슷했죠. 그래서 차실장은 열등감도 만회하고 군내에 나름대로 자기 인맥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육사 11기들을 밑에 두었을 겁니다.』(차실장의 출생과 결혼에 얽힌 비화는 다음회에 다룬다)
차실장은 특히 군보다는 경호실이 위에 있어야 한다는 야심으로 군의 젊은 장성들을 관리했다. L씨의 증언.
『차실장은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 작전차장보가 동기나 군후배들을 소개하면 이들을 격려하는 것을 즐겼어요. 주로 별을 달고 야전지휘관으로 나가는 후배들이 인사차 경호실로 전씨를 찾아오면 전씨는 이들을 실장방으로 데리고 가 소개시켰죠. 차실장은 이들에게 금일봉과 함께 「경호실장 증정」이라고 새겨진 지휘봉을 주곤 했는데 군후배들은 이를 더없는 영광으로 여겼죠.』<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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