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이슈, 그 이후 ① 납치 피살 용산 초등생 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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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초등생 살해사건 피해자 허모(11)양의 부모가 8일 인터뷰를 마친 뒤 ‘열한 번째 생일’을 맞은 딸의 유골이 안치된 벽제의 납골당으로 향하고 있다. 최승식 기자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잊고 싶지도 않고 잊을 수도 없어요. 평생 멍에를 짊어지고 살겠지요. 우리 사회에 어린이 범죄의 심각성을 알리는 작은 울림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올 2월 여론을 들끓게 했던 용산 초등생 성추행 살해사건에서 외동딸 허모(11)양을 잃은 허씨 부부를 8일 서울 시내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부부는 "오늘(8일)이 딸아이 열한 번째 생일이에요. 딸아이는 1년 내내 생일만 손꼽아 기다리곤 했는데…"라며 그동안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4월 1심 재판 이후 8개월 만에 다시 만난 허씨 부부는 전보다 훨씬 차분했다. 허양 아버지(38.회사원)는 "그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범인에 대한 복수심을 버린 듯 분노하지 않았다. "처음엔 사형이 당연하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지나고 보니 딸아이가 이미 떠났는데 사형이든 무기징역이든, 무죄든 무슨 소용이겠어요. 우리에겐 전부였던 딸을 잃었는데." 1심 재판에서 사형 대신 무기징역이 선고되자 허씨 부부는 재판정에서 "말도 안 된다"며 울부짖으며 항의했었다.

끔찍한 사건이 벌어진 뒤 두 달 만에 허씨 부부는 살던 동네를 떠났다. 이사하면서 허양의 물건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두 가져가 새로 방을 꾸며줬다. 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그 방에서 아이의 물건을 어루만진다. "아이 물건은 죽을 때까지 그대로 가져가려고요. 얼마 못 살아서 물건도 많지 않은 걸요." 아이 이름을 말하는 순간 허양 어머니(37.공무원)의 목소리가 떨리더니 끝내 눈물을 흘렸다.

사건이 일어난 지 10개월, 부부는 아직 완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허양 아버지는 잠이 오지 않아 밤이면 술기운으로 잠을 청한다고 한다. 허양 어머니는 주위의 권유로 정신과 치료도 받았지만 여전히 사람 만나기를 두려워한다.

"그만 잊어라" "아이를 하나 낳아라"는 주위의 걱정 어린 충고에 부부는 고개를 젓는다. "충격에서 벗어나 새로 태어날 아이에게 정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부부는 6월 정부가 성추행 전력이 있는 범인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이 같은 비극이 생겼다며 국가와 범인을 상대로 2억59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다. 돈이 목적은 아니다. 국가가 범죄예방에 더 노력해 주길 바라는 뜻을 담았다.

아버지는 "우리의 억울한 심정을 국가가 알아줘서 더 이상 이런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개선점을 찾아야 하는데 아직까지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배상금을 받으면 강력범죄 피해자 유자녀들의 학자금으로 전액 기부할 계획이다.

어머니는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국가가 가해자 인권은 챙기면서 피해자 가족은 나 몰라라 하는 게 안타까웠다"며 "강력범죄 피해자들이 경제적 고통까지 겪지는 않도록 도울 생각"이라고 말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범인을 용서했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다. 부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용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범인이 정말 참회한다면 하늘나라에 있는 딸아이에게 명복을 빌거나 기도를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 뒤 부부는 벽제 납골당으로 향했다. 생일을 맞은 아이에게 가기 위해서다. "너무 늦으면 안 돼요. 아이가 기다릴 텐데…"라며.

한애란 기자

요란했던 전자팔찌.얼굴 공개 등 대책 '지지부진'
사건 어떻게 처리됐나

올 2월 17일 심부름을 갔다가 실종된 초등학교 5학년 허모양이 다음날 경기도 포천에서 불에 탄 시신으로 발견됐다.

범인은 지난해 아동 성추행 혐의로 붙잡혔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김모(53)씨. 김씨는 허양을 성추행하려다 반항하자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뒤 시신을 논바닥에 갖다버렸다. 범인 김씨는 11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사체유기에 가담한 김씨의 아들에게도 징역 3년형이 선고됐다.

이 사건으로 당시 아동 성범죄자 관리문제가 크게 이슈화됐다. 미국처럼 아동 성범죄자의 얼굴 사진을 공개하고 주거지를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었다. 성범죄자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일부 국회의원은 성범죄자 야간출입통제와 화학적 거세 등 각종 처방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법 개정은 아직 요원하다. 국회엔 10여 건의 성폭력 처벌 관련 법률안이 발의된 상태지만 법안심사는 지지부진하다. 한나라당이 발의한 '전자팔찌법'도 인권단체와 여당의 반발에 부닥쳐 전망이 불투명하다.

사건 이후 국가청소년위원회는 성범죄자 신상을 10년 동안 지역주민에게까지 공개하는 내용의 청소년성보호법 개정안을 마련했다. 하지만 지난달에야 국회에 제출돼 통과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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