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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영선칼럼

세한도와 정권의 겨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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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세한을 맞이하는 마음에 정말 와 닿는 것은 그림 옆에 써진 글의 내용이다. 제자 역관(譯官) 이상적이 청나라 연행 길에서 힘들게 구한 서적들을 세상의 모든 권세와 이익을 잃고 제주에서 귀양살이하는 완당에게 보냈기 때문에, 스승 김정희(1786~1856)는 고마운 마음을 그림 같은 글씨로 절절하게 적어서 그림과 함께 제자에게 전한 것이다.

완당은 세한도에 송백(松柏) 네 그루를 그린 연유를 "날이 차가워진 이후라야 송백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라는 공자 말씀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권세와 이익을 따라서 부나방처럼 날아다니는데 제자 이상적은 계절 따라 옷을 갈아입지 않는 송백처럼 세한을 겪고 있는 스승 모시기에 변함이 없다는 것이다.

세한도의 아름다움은 과감한 버림과 나눔의 따뜻함에 있다. 송백 네 그루와 허름한 집 한 채 빼고 나머지 공간을 다 버림으로써 겨울의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살아나고 있다. 동시에 변하지 않는 송백의 마음 나눔은 허름한 집을 훈훈하게 만든다.

이번 겨울을 누구보다 춥게 맞이하는 사람은 노무현 대통령이다. 유행가 가사처럼 세월은 유수 같아서 따뜻한 봄이 찾아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을씨년스러운 겨울의 문턱에 들어섰다. 노무현 정부의 마지막 한 해가 남은 것이다. 이 한 해를 노추(老醜)로 장식하지 않으려면 세한도의 미학을 하루빨리 배워야 한다. 그 첫걸음은 버림의 미학이다.

겨울을 겨울답게 만드는 것은 낙엽이다. 남은 한 해 동안을 수확의 계절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버림의 계절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명하다. 북핵 위기의 평화적 해결과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무리하지 말아야 한다. 북한의 수령체제는 단순히 세한의 계절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새봄을 예측하기 어려운 죽음의 행군을 앞두고 있다. 따라서 북한이 경제 지원, 관계 개선, 체제 보장과 핵무기를 바꿀 수 있다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다가오는 6자회담에서 부분적인 결실을 수확할지라도 결국 북한의 새로운 생존전략이 마련되지 않는 한 6자회담을 통한 북핵 위기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남북 정상회담도 마찬가지다. 국내 대통령 선거에 일조할지는 모르나 남북 관계 개선이나 핵 위기 해결의 돌파구를 마련하기는 어렵다. 한.미 관계 개선도 마찬가지다. 양국 정부의 전략적 사고가 변환과 탈냉전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전술적 개선 이상의 변화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마지막 일 년 동안 노무현 정부가 전심전력해야 할 것은 국내 경제 문제다. 중국은 최소한 2020년까지 국내 경제 성장에 전념하기 위해 모든 국제 문제를 문제화하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 노력을 해야 할 만큼 국내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다. 남북한 관계와 한.미 관계는 모두 경제우선주의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조종해 나가야 한다.

참여정부의 역사적 임무는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지난 4년 동안의 부동산 정책, 교육 정책, 대북 정책, 한.미 동맹 정책의 실패는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러나 중국은 문화혁명의 세기적 실패를 역사적 자산으로 삼아 개혁개방의 새로운 실험에 성공함으로써 21세기 초강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남은 기간에 할 일은 실패한 4대 정책들을 무리하게 지속적으로 추진하기보다는 2008년 새로 들어 설 정부가 전철을 밟지 않도록 도와주는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대했던 4대 정책의 좌절 원인에 대한 철저한 자아비판을 통해 21세기 한국 미래사의 위대한 반면교사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국정 인계위원회의 역사적 임무를 조기 가동하는 것이다. 낙엽의 아름다움은 떨어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대신 새봄에 눈 뜰 싹들의 거름이 되는 것이다.

하영선 서울대 교수.국제정치학

*** 바로잡습니다

12월 11일자 35면에 실린 하영선 칼럼 '세한도와 정권의 겨울'중 둘째 단 셋째 줄에 나오는 이언적은 이상적으로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