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나의 선택 나의 패션 3. 오간디 원피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1937년께 서울 시내 한 사진관에서 언니左와 내가 문제의 원피스를 입고 찍은 사진.

나는 일곱 살 때부터 부모님.언니.동생들과 함께 서울 계동에 새로 지은 2층 양옥집에서 살게 됐다. 외할머니 밑에서 공주처럼 지내다가 언니, 두 동생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다소 '피곤한'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우리 동네에는 경성에서 이름이 꽤 알려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우리 집 바로 윗집에는 소현세자 이왕(인조의 장자이자 효종의 형)의 후손들이 살았고, 그 윗집은 모 남작의 집이었다. 골목 끝은 민 대감 집, 우리 뒷집(지금의 현대 사옥 자리)에는 또 다른 민 대감 집이 있었다. 아랫집은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던 여운형씨가 살았다.

그중 우리 집은 동네에서 가장 먼저 지어진 양옥인데다 앞마당 연못과 아코디언 모양의 철제 대문 덕분에 사람들의 화젯거리였다. 어느 날 나는 우리 집 마당을 보고 싶어하는 아이들에게 성냥 한 개비만 가져오면 소원을 풀어주겠다고 장난처럼 말했다. 다음날 이 말을 전해들은 아이들이 우리 집 앞에 끝이 안 보일 만큼 길게 늘어서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의 이같은 장난기와 기발한 발상을 걱정하시는 것 같았다. 학교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께도 귀여움을 받는 나무랄 데 없는 아이였지만,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내가 어려서부터 하는 짓을 보면서 불안해 하셨다.

어릴 적부터 부끄럼이 많아 사람들 앞에 쉽게 나서지는 못하는 성격이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서서히 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아홉 살쯤이었다. 어느 토요일 쇼핑가셨던 어머니가 언니에게 주려고 오간디 원피스를 사 오셨다. 나는 늘 언니 옷을 물려 입었지만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당연한 것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그 오간디 원피스만큼은 너무 예뻐서 부러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머리가 핑 돌 정도로 화가 난 나는 그 원피스를 와락 붙들면서 "이 옷이랑 똑같은 것을 사주지 않으면 가위로 잘라버릴거야"라고 소리쳤다.

어머니는 "자르려면 잘라 봐라."라며 으름장을 놓으셨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죽기밖에 더하려고' 마음 속으로 이렇게 외치며 눈을 질끈 감고 가위로 옷을 싹둑 잘라버렸다. 오간디는 짜깁기도 되지 않는 옷감이다.

잠시 후 눈을 떠보니 어머니는 벗어 놓으신 외출복을 아무 말 없이 다시 입고 계셨다. 그리곤 곧바로 다시 백화점으로 가셔서 나를 위해 새 원피스를 사다 주셨다. 내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

그 옷을 입고 찍은 사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언니 것은 푸른색 체크 무늬였고, 내 것은 하얀 레이스 소재의 넓은 칼라에 사탕처럼 생긴 귀여운 단추가 달려 있는 것이었다. 이 멋진 원피스는 소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나와 함께 했다. 학예회는 물론이고 소풍이나 운동회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있는 날이면 언제나 이 옷만을 입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