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관 사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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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그는 자신을 「언관 사관」에 비유했다. 같은 제목의 저서를 낸 적도 있었다. 「관」자가 좀 어색해 보이지만 그것은 유래가 있는 말이다.
언관은 조선왕조때 사헌부,사간원의 관명인데 이들이 하는 일은 임금에게 바른 말을 하는 것이었다.
고려때는 사관이라는 관직을 두고 임금의 언행과 정사,문무백관들의 잘잘못을 직필로 적어 후세에 거울로 삼게 했다. 사학자 장지연선생은 언론의 역할을 그 사관에 견주었다.
언관으로서의 천관우씨는 한마디로 『권력에 의한 부당한 압력은 언제,어디서나 결연히 저항』하는 자세로 일관해 왔다. 제3공화국,그 암울한 시절에 그는 언관으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민주회복 국민회의」의 대표로 참가했다. 그 기구는 박정희 독재에 가장 선두에서 정면으로 저항한 상징적이고,대표적인 조직이었다.
사관이며 사학자이기도 했던 천씨의 저서로는 『한국사의 재발견』,『한국 상고사』를 빼놓을 수 없다. 비록 시론이라는 단서는 달았지만 우리의 국가형성기를 BC320년으로 끌어올린 그의 학문적 업적은 높이 평가받을 일이다.
종래 우리의 국가기원은 고구려 태조대(AD53) 아니면 백제(AD234)나,신라 내물대(AD356)로 보아왔다. 그러나 천씨는 조선후가 스스로 왕이라고 칭한 연대인 기원전 320년을 우리의 국가기원으로 보았다.
역사인물중에서 양만춘을 닮고 싶은 멋쟁이로 꼽은 것은 좀 뜻밖이다. 당태종이 안시성을 포위하고 넉달이나 혈투를 벌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엄동이 몰아닥쳐 태종은 그만 군사를 물러서게 했다. 이때 양만춘은 당군을 뒤쫓지 않고 성루에 올라 『잘 가거라』하고 손을 흔들었다는 것이다.
독재에 항거하며 당차고 고집스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의 내면엔 이런 마음의 여유를 동경하는 일면이 숨겨져 있었다. 선비다운 면모다.
그는 후학들이나 후배 언론인들과는 언제나 허물없이 소줏병과 멸치를 내놓고 대작을 즐겼다. 그때마다 하는 얘기는 우리 민족을 비하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남의 나라 역사에도 있는 왕조들의 당쟁,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국가생존을 위한 외교술이 뭐가 탓할 일이냐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역사의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자세,그것은 그의 삶의 태도였지만 우리에게 주는 값진 교훈도 된다. 그동안 집요한 투병생활을 해온 그의 부음을 들으며 생각나는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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